경주 사천왕사지 (慶州四天王寺址)

이 사천왕사를 어떻게 지었는 것인데, 그것 하나쯤 제대로 복원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줄 때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낭산 사천왕사지 (慶州四天王寺址)

선덕여왕의 예언대로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 그 규모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7번 국도가 바짝 치고 들어와서 귀부는 거의 묻힐 지경이고 당간지주는 지나가는 차에 받쳐 깨어지기도 하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금당 터는 철로가 가로질러 깔고 앉아있다. 지금의 사천왕사지는 사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으로부터 당한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그것을 한번쯤 입장을 뒤집어 보면 그들은 침략의 야욕과 함께 문화에 대한 안목이 상당히 앞섰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 당시 우리는 쇄국으로 인하여 닫힌 바깥세상은 너무나 외면하고 제 살 뜯어 먹기에만 급급했다. 일반 백성들은 당장 먹고살기에도 벅차서 문화라는 말 자체도 모르고 살아왔다.

오히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숨어있던 문화재를 도굴하도록 도와준 한심하고도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문화재 용어조차 거의 그때 만들어진 것이라서 매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많은데 그것을 우리는 아직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예를 들자면 식리총의 식리가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 황당한 것은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그걸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일본은 나쁘다는 편견만 가득 찼다. 식민지의 그림자를 지운다면서 뒷북이나 치면서. 사천왕사의 빈터를 바라보면 갈기갈기 찢어진 우리 역사의 아픔이 더욱 처절해 보인다. 이 사천왕사를 어떻게 지었는 것인데, 그것 하나쯤 제대로 복원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 줄 때가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도 이렇게 멋진 목탑이 나란히 서 있었다는 것을 덮어 놓지 말고 일으켜 세워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창건 설화가 다분한 다른 사찰에 비해 사천왕사의 탄생에는 많은 사연 들이 얽혀있다.

668년 김인문 등과 당나라 군사는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에 당나라는 더 욕심을 부리다가 신라가 이를 알고 먼저 당나라 군사를 내쫓았다. 이 일로 다음 해에 당나라 고종이 김인문을 불러들여 문책하였다. 그리고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장수 薛邦(설방)과 50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유학하던 중이었다. 의상법사는 김인문을 만나서 전후 사정을 듣고는 곧바로 신라로 돌아와 그 내용을 알려주었다. 다급한 문무왕은 明郞(명랑)법사에게 대책을 강구 했다. 그래서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神遊林(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최하라고 조언을 하였다. 이때 貞州(정주, 경기 개풍)에서 전갈이 왔는데 당나라 군사가 벌써 국경 근처 바다까지 몰려온다고 했다. 더욱 조급해진 문무왕은 명랑법사를 또 불렀다. 이에 명랑법사는 비책을 내놓았다. 먼저 임시로 절을 짓는데, 여러 가지 비단으로 꾸미고 五方(오방)의 神像(신상)을 짚풀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瑜珈(유가)의 고승 열두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조리 물속으로 침몰하였다. 그 후에 절을 정식으로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했다. 671년에 다시 당나라는 장수 趙憲(조헌)과 5만 군사가 쳐들어왔다. 이때도 역시 그 전과 같은 비법을 쓰니 모두 침몰하였다. 당나라 고종이 김인문과 같이 옥에 갇혀있는 朴文俊(박문준)을 불러서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박문준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臣이 신라를 떠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나서 잘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나라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고 합니다. 당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禮部侍郞 樂鵬龜(예부시랑 악붕귀)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사천왕사를 보여줄 수 없으니까 그 앞에 따로 다시 절을 급하게 세웠다. 서라벌에 도착한 악붕귀는 먼저 황제의 복을 비는 천왕사로 가려고 할 때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다. 악붕귀는 바로 알아차리고 이 절은 望德遙山(망덕요산)의 절이라고 하며 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金 일천냥을 쥐어주며 당나라로 좋게 돌려보냈다. 악붕귀는 황제의 복을 비는 절을 잘 보고 왔다고 꾸며댔다. 이리하여 악붕귀가 말한 대로 새로 지은 절은 망덕사가 되고 말았다.

사천왕사는 향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주석을 하였다. 제망매가와 산화가, 도솔가가 남아있다. 월명스님은 피리를 잘 불어서 달도 쉬어 갔다고 한다. 스님이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탑. 서탑이 있고 뒤로는 좌경루와 우고루가 있어서 마치 본존불이 안치된 금당을 중심으로 사천왕이 배치된 것과 같은 특이한 가람형태를 이루었다. 통일 전의 신라 사찰은 모두 금당 앞에 1기의 삼층탑 또는 오층탑을 세우는 일탑일금당 형식을 따랐다.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일금당 형식으로 변한다. 목탑으로서 쌍탑일금당 형식은 사천왕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석탑으로는 감은사이다. 귀부는 2기가 남아있지만 모두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이다. 나머지 부분을 보면 역동적인 모습이 통일 신라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선명한 귀갑문과 가장자리의 당초문은 우수한 조각으로 되어있다. 


사천왕사 당간지주

사천왕사 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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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