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의 성은 박이요.

신라의 역사는 곧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와 문화를 아울러 정치체제에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다.

이차돈의 성은 박이요.

신라에 불교가 뿌리내리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삼국사기에는 눌지왕과 비처왕 때라고 하고 해동고승전에는 법흥왕 때 그리고 수이전에는 미추왕 때라고 한다. 그만큼 불교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신라의 역사는 곧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와 문화를 아울러 정치체제에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신라는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순도가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마라난타가 신라는 눌지왕 때 묵호자가 각각 처음으로 전하였다. 묵호자가 은신하며 지내다가 떠난 뒤에 미추왕 2년(263)에 아도가 찾아왔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고 아도는 죽었다. 그 후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차돈이 나타났다.

이차돈은 박씨이며 이름은 염촉이다. 방언으로 이차 또는 이처라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진찬으로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이차돈은 대쪽과 거울 같은 성품을 가졌다. 22세에 舍人의 직책에 있으면서 조정의 충신으로 황하의 물이 맑아서 흐르듯 태평성대 하기를 기대했다.


어느 날 이차돈은 법흥왕의 심정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죽이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고 임금을 위해 목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신의 목을 베면 만민이 굴복하여 감히 어명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
왕은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 장차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서 일곱 마리 짐승을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어찌 나의 뜻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는가."
이차돈은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身命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내일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교는 성행하고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 "
법흥왕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부술 기세를 품었다 하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히 대사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차돈은 맹세했다.
"대성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리어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요. “

왕의 명령으로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다. 붉은 피가 아니라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났다.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날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

그의 머리는 금강산 마루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자추사를 세웠다.(本報 2021.11.15.일자 경주 소금강산 기사 참조)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며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를 행하여 마땅히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진흥왕 5년(544)에 대흥륜사를 세웠다. 양나라 사신 沈湖가 사리를 가져오고 陳나라 사신 劉思가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하늘의 별처럼 벌여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당간을 세우고 범종도 달아 대승 소승의 불법은 서라벌의 자운이 되었다.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오니 이 때문에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를 통틀어 한 집이 되었다.


아도, 법흥, 이차돈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임금이 없었으면 이런 신하가 없었으며 이런 신하가 없었으면 이러한 공덕이 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라는 물고기가 제갈량이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 모인 것이다. 


이차돈순교비  경주박물관  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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