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광덕사 뒷산의 운초 김부용

운초 김부용 19세, 평양감사 김이양 대감 77세 그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이렇게 나누었다.

천안 광덕산 운초 김부용 묘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고 서산에는 또 하루해가 저문다
오늘도 님 소식은 끝내 없건만 그래도 아쉬워 문을 못 닫소

실버들 휘늘어진 창에 기대어 님 없는 집에는 이끼만 낀다
주렴 밖엔 봄바람이 절로 불어와 님 오시나 속은 게 그 몇 번 인고...“

김이양 대감이 한양으로 부르길 간절히 기다리며 운초는 이 시 한 수를 남기었다. 운초 김부용 19세, 평양감사 김이양 대감 77세 그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이렇게 나누었다.

김이양은 호조판서로 임명받고 한양으로 올라가며 김부용을 기적에서 빼 준다. 그리고 그녀는 김이양의 소실로서 초당마마로 불리며 살았다.

1843년 2월 김이양은 사마회갑(司馬回甲 과거급제 후 60년이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과 함께 순행한다. 김이양은 고향을 다녀온 이듬해인 1884년 10월에 감기로 향년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약 15년을 같이 살고 또 약 15년 홀로 정절을 지키며 살던 김부용도 49세에 죽음을 맞는다. 약 350수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떠난 운초 김부용 묘는 광덕사 계곡 언저리에 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의 묘가 있는 광덕사 뒷산 이곳에 묻혔다. 시들은 상사화꽃 흔적들과 구절초와 아름드리 소나무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부용 묘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3대 시기(詩妓)는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운초 김부용(金芙蓉)이다. 그녀의 묘가 1974년에 당시 ‘명기열전’을 집필하던 소설가 정비석 선생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껏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고 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1991년10월19일 세상을 떠났고, 당시 고증했던 서상욱 노인도 1998년에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매년 4월말이면 천안문화원 주최로 천안문인협회, 천안향토사연구소, 천안차인회,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광덕산(廣德山, 699m)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과 아산시 배방면·송악면 사이에 있는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우거진 명산이다. 광덕산 동남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廣德寺)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진산대사가 중건한 절로 경기·충청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는 등 우리 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년고찰인 만큼 광덕사는 보물 4점을 포함하여 14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광덕사는 우리나라 호두나무 시식지(始植地)로 보화루 앞에는 400살이 넘은 광덕사 호두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약 700년 전인 1290년(고려 충렬왕 16) 9월에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1329]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져 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한다.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두가 전래된 시초가 되었다 하여 이곳을 호두나무 시배지 [처음 심은 곳]라 부르고 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