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2가에 서있는 용두사터 철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2가에 서있는 용두사터 철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든 지주는 높이 4.2m이며, 철당간 높이 12.7m, 철통 높이 0.63m, 철통지름 0.4m이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을 말한다. 신라시대 이후로 사찰의 건립과 동시에 많은 당간이 설치되었으나 대개 석조로 된 지주만 남아 있고 당간은 없어졌다. 철당간으로는 보물 제256호인 공주 갑사(甲寺)의 철당간과 경기유형문화재 제39호인 칠장사 당간, 이 용두사지 철당간 3개만이 남아 있다. 그밖에 목재 당간에 대한 기록이 담양의 당간 비문에 있으며, 지정되지 않은 몇 기의 당간이 현존한다.


당간의 지주는 화강석으로 양 지주가 마주 서 있고 그사이에 원통 모양의 당간 20개를 연결시켜 철제당간을 세웠다. 양 지주는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롭지 않도록 변화를 주었고, 지주의 맨 위쪽에는 고정 장치를 만들어 당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철당간의 밑에서부터 세 번째의 철통 겉면에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銘文)에 따르면 962년(고려 광종 13)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당과 당간의 조성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각 사찰에서 성행했는데, 당은 내구성이 없어 남아 있지 않고 당간과 지주만이 각 사찰의 입구에 원래의 모습대로 전하고 있다. 당간의 재료는 대부분 목재였다고 짐작되며 현존하는 당간은 철재나 석재로 된 것이며, 대개 지주만 남아 있다.
당간은 파사현정(사사로운 도를 파괴해 정법을 창현함)의 뜻을 가지며 때로는 불교 종파를 나타내는 기치로서 사찰의 문전에 세워지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간두에는 봉황두(鳳凰頭)를 장식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금동제 당간의 용두식(龍頭飾)을 통해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간두식(幢竿頭飾)의 예는 팔각의 보개와 보주가 장식되어 있는 나주동문외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보물 제49호)과 금속제 보륜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경장식이 있는 담양읍내리석당간(潭陽邑內里石幢竿:보물 제505호)이 있다.


철통에 새겨진 명문을 보자. (판독자 정병삼)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 餝佛門之玉標 幡盖由來」 粧寶殿之神旆 其狀也 鶴翔碧空 龍躍 靑霄 立之者旁發信心 望之者必傾丹」 愿 固知伏魔鐵杖 拂賊霓旌 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 州里豪家 鄕閭冠族 偶因染」
疾 忽約」 佛天 仰祈則敬造鐵幢 俯誓則莊嚴玉刹 然而」 難停逝水 易沒黃泉 已間數歲遲延 隔時」
容易 於時從兄堂大等」2) 金希一等 彼爲還願 此繼頹繹 遂令鑄」 成三十段之鐵筒 連立六十尺之幢柱 穿雲」
捧日 貫霧倚空 魯氏雲梯 難攀龍盖 甘」 寧錦纜 未敵璅繩 可謂奉往心深 興亡情切」 植金剛之不朽 營玉刹之無窮 僕者膠柱頑」 流 剋舟膚物 忽蒙勸我 聊表短章 其詞曰」 幢竿始立 天半可及 巧成物像 莊嚴佛法 兄」 弟兩家 合脩善業 鑄之植之 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 金守▨」 金釋希大 金寬謙 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大 前兵部卿慶柱洪大 學院卿韓明」 寔柰末 前司倉慶奇俊大舍 學院郎中孫仁謙 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 (번역자 정병삼)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대 당간(幢竿 :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매다는 것으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사찰이나 법당 앞에 세움)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佛門)을 꾸미는 옥같은 표지 이며 번개(幡盖 : 깃발로서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 도구)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 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근래에 당대등(堂大等: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반(盧班: 수레에 사다리를 달아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만든 사람)의 사다리로도 용개(龍盖)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 오 나라 사람으로 호사를 즐겨 비단으로 배를 묶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교처럼 완고한 사람으로 어리석고4) 천박한데5)문득 나에게 권유함을 입게 되어 겨우 짧은 글을 나타낸다. 사(詞)에 이르기를,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에 미치니 공교롭게 물건의 모양을 이루어 불법을 장엄하도다 형제간의 두 집이 합쳐 선업을 닦아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이 절(용두사)의 영(令)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令)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대등(大等: 고려 향리의 유력자 직임으로 당대등에 이은 둘째 직책. 성종 때 副戶長으로 이름이 바뀜), 김관겸(金寬謙) 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부경(前 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 나말(柰末 : 나마(奈麻), 신라의 17관등의 11관등),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 : 신라 17관등의 12관등), 학원 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 주대▨▨(鑄大▨▨) 준풍(峻豊: 고려 광종의 연호, 960~963) 3년(962, 광종 13) 임술년 2월 29일에 주조하여 완성함.



중앙공원은 청주시의 한가운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공원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린 압각수와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 망선루가 있다. 병마절도사 영문은 목조2층의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각지붕으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앞에는 1천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 압각수와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기리는 비와 한봉수의 송공비, 박춘무의 비 및 서원향약비 등이 있다. 청주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시민을 위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가 열린다. 공원 안에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충북기념물 5)와 목조 2층 누각인 병마절도사영문(충북유형문화재15), 조헌전장기적비(충북유형문화재136), 척화비(충북기념물 23) 등 유적이 많다.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는 나뭇잎이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고려말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정지·이승인·권근 등이 청주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홍수가 났다. 이 때 근처에 나무가 있어 죄수들이 올라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 나무가 바로 압각수였다는 것이다.

[문화재 정보]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압각수(충북기념물 5호), 망선루(지방유형문화재 제 110호), 조헌 전장기적비(지방유형문화재 136호), 청주 척화비(지방기념물 23호)등이 있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