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아트에서 소산 박대성을 찾았다.

그의 눈을 통해 들어온 사물을 그 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발효룰 시켜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강요한다. 기본을 꾸준히 익혀가면서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소산의 방식이다. 그래서 초창기의 제자들은 많이 힘들어 했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의 밑거름이란 것을 깨닫는다.

 소산 박대성의 개인전 마지막 날이다.


전시장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10명 이내로 관람이 제한되었다. 덕분에 오롯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어 감동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먼저 8m나 되는 불국사 설경이 압도한다. 대작을 그리려면 물론 그만한 공간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로 힘이 드는 작업이다. 그러나 소산은 이러한 과정을 수행으로 여기고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이어간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도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지 않을까. 재야권에서 홀로 우뚝 서서 수많은 바람과 맞서지만 그 어떠한 난관에도 오로지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옆에서 바라보면 믿음이 갈 수밖에 없다.




소산은 한국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지만 타고난 재주를 감출 수 없어 일찍부터 오직 그림에만 몰두를 해왔다. 온 산천을 주유하다가 중국의 거장 장대천(1899~1983)을 찾아가서 사사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엄청난 궤도에 올라서고 중앙미술대전에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 개성이 뚜렷해서 파벌로 이루어진 미술계에 한마디로 이단아였다. 미운털이지만 결코 작품까지는 외면할 수 없는 탁월한 경지였다. 이후에도 모든 러브콜을 마다하고 오직 작품에만 매진하며 붓을 들고 고행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심혈을 기울여 걸출한 작품들을 마구 뽑아낸다.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소품부터 앞마당을 모두 덮을 정도로 큰 화폭 앞에서도 거침없는 붓놀림은 가히 신들린 듯 볼 수 있다.

소산은 가톨릭이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성경과 불경을 앞에 놓고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는 어디를 가서라도 주일이면 꼭 성당을 찾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이런 바탕 위에 맑고도 꼿꼿한 붓놀림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소산의 작품 과정은 먼저 현장을 제일중요 시 한다. 대작이 아닌 경우 대다수는 그 자리에서 완성한다. 현장의 참모습도 중요하지만 그 느낌을 그대로 받기 위해서이다. 서울에서도 맹금류인 소쩍새를 직접 키우며 그림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눈을 통해 들어온 사물을 그 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발효룰 시켜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강요한다. 기본을 꾸준히 익혀가면서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소산의 방식이다. 그래서 초창기의 제자들은 많이 힘들어 했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의 밑거름이란 것을 깨닫는다.

소산은 특히 금강산과 경주를 너무 좋아했다. 매번 서울에서 경주까지 먼거리를 이동하며 작업하기가 번거로워 아예 평창동 자택을 처분하고 경주 남산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경주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한동안 경주시에서 시립미술관을 지어 준다고 본의 아니게 주위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그 계획은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반감을 가지고 강력하게 따지고 들었다. 경주라는 곳 이 보수적이라는 것을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결국은 솔거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고 코너를 하나 마련하고 말았다. 최근 삼성문화재단에서 기증한 유물을 두고 각 지방자치 단체마다 서로 유치하겠다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경주에도 소산미술관이 생기면 그 나비효과가 엄청난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대하는 처사는 너무 가혹하고 이기적이었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경주에도 영상박물관 음악박물관 성박물관 벼루박물관 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경주의 산천을 그리고 경주의 정신을 작품에 담고자 하는데 그 뜻이 충분히 전해지지 못해서 못내 아쉬울 뿐이다. 소산은 또 서체를 독특하게 개발해서 쓰고 있다. 먼저 붓을 잡는 법부터 다르다. 그의 글씨는 서예가 보여주는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또 친근하게 녹아드는 매력이 있다. 시 서화를 두루 섭렵하였으니 어떻게 붓을 휘둘러도 작품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때는 청와대에도 작품이 있었지만 그런 정치 소용돌이에나 감투에는 전혀 관심 밖이다. 한평생 그림으로 일구어온 터전 속에 그 그림 속으로 파묻히기를 원한다. 요즘에는 경주박물관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오늘도 홀로 남산 기슭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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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