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대한제국 황실의 복식, 적의

이 적의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영친왕* 내외가 고국으로 돌아와 1922년 4월 29일에 순종(純宗, 재위 1907~1910년) 황제와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년)를 알현할 때 영친왕비가 착용하였던 궁중 예복이다.

7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대한제국 황실의 복식, 적의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영친왕비(英親王妃, 1901~1989년)의 적의(翟衣) 일습이 소장되어 있다. 이 적의는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영친왕* 내외가 고국으로 돌아와 1922년 4월 29일에 순종(純宗, 재위 1907~1910년) 황제와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년)를 알현할 때 영친왕비가 착용하였던 궁중 예복이다.


영친왕비 9등 적의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성들의 최고 예복

적의는 꿩 무늬(翟紋)가 직조된 직물로 만든 옷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왕의 면복(冕服)에 상응하는 여성의 대례복(大禮服)으로 국가의 큰 제사를 올리거나 가례를 올릴 때, 또는 책봉을 받을 때 등 가장 중요한 행사에서 착용한 최고의 예복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대비,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과 대한제국의 황후, 황태자비와 같이 왕실의 적통을 잇는 내명부들이 착용하였다.

적의는 고려시대인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로부터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제도는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이어져 왔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여러 과정을 거쳐 영조 때에는 우리식 적의 제도를 완성하여 대한제국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고종(高宗, 재위 1863~1907년)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관복 제도를 참고하여 복식 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황후와 황태자비는 심청색 적의를 대례복으로 착용하였다.

영친왕비 적의는 대한제국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심청색 바탕에 꿩 무늬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 무늬를 한 줄씩 배치하고 깃과 도련, 소매 끝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착용자의 신분에 따라 꿩의 배치와 홍색 선의 무늬를 달리 나타내었는데 영친왕비는 황태자비의 지위로 아홉 줄의 꿩을 직조하고 홍색 선에는 봉황과 구름무늬를 금사(金絲)로 직조하여 무늬를 나타내었다. 영친왕비 적의의 구성은 적의, 중단(中單), 대대(大帶)와 후수(後綏), 폐슬(蔽膝), 패옥(佩玉), 옥대(玉帶), 하피(霞帔), 말(襪), 석(舃), 규(圭)가 일습을 이루며 이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최초로 국내에 반입된 문화재

영친왕과 일본인인 영친왕비는 1920년에 혼인한 이후 왕실에서 제작한 의복과 장신구를 받아 소장하고 있었다. 영친왕 부부는 일본에서 생활하던 중 일본의 패전으로 1947년에 황족 및 왕족이 특권 계급에서 평민으로 격하됨에 따라 생활상 어려움을 겪게 되어 살림을 줄이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영친왕비는 그동안 소지해 온 조선 왕실의 복식들을 보관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동경국립박물관 측에서도 보관 의사를 적극적으로 내비쳐 1956년 복식 일괄을 동경국립박물관에 위탁 보관을 맡겨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보관되어 있었다.

故 김영숙 동양복식연구원장이 영친왕비의 소개로 1963년부터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을 수차례 조사하였고 이후 적의 등 영친왕 일가의 궁중 복식 일괄이 일본에 비공개로 보관되어 있음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였다. 실무에 직접 참여하였던 당시 故 정재훈 문화재관리국장의 회고에 따르면, 1988년 올림픽 개최 관련 문화행사로 동경국립박물관이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영친왕 일가 복식과 장신구 유물을 전시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故 정한모 문화공보부장관에게 보고하여 이 유물들의 국내반입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하는 복식이 일본 소장품으로 소개되는 상황은 여론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전시가 끝난 후, 정식 절차를 밟고 다시 일본으로 반출이 되면 공식적으로 일본 소유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후 영친왕비 쪽에서 위탁 유물을 돌려받기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동경국립박물관 측은 이미 유물 일괄이 국유화되어 일본 정부와 논의해야 한다는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궁중 유물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궁중유물전시관’ 설립을 추진 중이었고, 영친왕 일가 유물은 이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설득하였다고 한다. 정부 역시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으로부터 영친왕 일가 복식을 돌려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에 1988년부터 3년간의 반환협의과정을 거쳐 1991년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1991년 4월, 한일 간에 ‘영왕가에 유래하는 복식 등 양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해 10월에 복식 유물들을 일본으로부터 돌려받게 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현재 국가민속문화재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영친왕 일가 복식은 한일 정상회담 이후 최초로 돌아온 문화재일 뿐 아니라 조선 왕실복식 문화의 실상 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는 궁중유물전시관을 대표하는 유물이 되었으며 이후 이를 이어받아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왕실의 위용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로 선보이고 있다.


02.영친왕비의 적의 착용 모습(1922년) ⓒ국립고궁박물관   03.대수머리를 장식한 장잠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황실의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

현존하는 적의 유물은 세종대학교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에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다. 세종대학교 박물관에는 순정효황후가 착용하였던 12등 적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으며 적의와 중단, 폐슬, 하피, 청석만이 남아 있고 서울역사박물관의 9등 적의는 착장자가 명확하지 않다.

한국으로 돌아온 영친왕비의 적의는 일습이 모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의를 착용할 때 머리에 썼던 대수머리와 이를 장식하는 장신구들이 함께 남아 있어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영친왕 일가 복식과 장신구 유물 일괄은 1920년대의 복식으로 시기가 빠르진 않지만, 예복부터 평상복까지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당시의 형태 및 착장 방식을 알 수 있는 귀한 궁중 생활사 연구의 기초자료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 영친왕(英親王, 1897~1970년): 고종 황제와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순종이 재위에 올랐을 때 자손이 없는 형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다. 출처/이정민(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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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