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생 의례 관혼상제 2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 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인의 일생 의례 관혼상제 2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마다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의례로 출생부터 관례, 혼례, 환갑/ 회혼례, 상장례, 제례를 일컫는 관혼상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관례에 관하여

사대부가의 성년식
관례는 아이가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의례이다. 우리나라의 관례는 고려 말에 『주자가례』가 유입되면서 사대부 계층에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주자가례』 등의 예서에 따라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널리 행해졌으며, 관례를 해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관례는 가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성대하게 치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집안 형편에 맞게 간략하게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관례해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성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관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관례의 재시행이 논의된 것은 중종 때의 일이다. 중종 13년 1월에 시강관(侍講官) 민수천(閔壽千)은 “관례는 곧 성인이 되는 큰 예이므로 옛사람은 그것을 중히 여겼는데 뒤에 폐지되고 행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관례를 시행할 것을 촉구한다.

중종 때부터 조정의 주도 아래에 『오례주의』의 「문무관관의」와 『주자가례』에 따른 관례가 일반인에게 장려되었다. 이로 인해 관례가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가에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관례는 가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성대하게 치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집안 형편에 맞게 간략하게 치르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중시하는 가문에서는 관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사대부가에서 행해졌던 관례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3일 전에 조상의 사당에 고하는 고우 사당으로 시작한다. 빈을 정하는 글을 보내 승낙을 받는다. 이를 계빈이라 한다. 관례일이 되면 아침 일찍 집안 대청의 동북쪽에 휘장을 두른다. 그리고 대청 가운데에 탁자를 놓는다. 탁자 위에는 난삼, 조삼, 심의, 신, 빗, 망건, 큰띠, 가죽신 등의 관복을 놓고 관례 장소를 설치한다. 이를 진설이라 한다. 갓 쓰고 심의 입고 복식을 갖추는 것을 시가례라고 하며, 심의를 벗고 조삼을 입는 것을 재가례라 한다. 복두를 관례자의 머리에 씌워 주고, 찬이 관례자의 갓끈을 메어준다. 관례자가 방으로 들어가서 조삼을 벗고 나서 난삼을 입는 것을 삼가례라 한다. 술을 마시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를 초례라고 한다. 빈은 관례자에게 새로운 자를 내려주는데, 이를 자관자례(字冠者禮)란 한다. 주인은 관례가 끝나면 관례자를 데리고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고했다. 이를 현우사당이라 한다.


사진 / 네이버


관례가 끝나면 관자는 찾아온 친척과 손님에게 절을 하고, 또 밖으로 나가서 동네 어른들과 아버지 친구들에게 두루두루 절을 올렸다. 사대부가에서 행해진 관례는 왕실의 관례 절차에 비해서는 약간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대부의 관례는 『국조오례의』의 「문무관의」 편과 『주자가례』나 『사례편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자의 관례는 삼가(三加)로 하고 아버지를 주인으로 하고, 계례는 단가로 하며 어머니가 주인이 되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사대부에서 시행되었던 관례의 모습은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등의 관찬서 뿐만 아니라 이익의 『성호사설』과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문집에도 관례와 관련된 기사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구례리 괴화동의 서재풍은 7~8세 때에 당숙들이 관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나이 20세를 전후에 길일을 택하여 행한다. 관례를 올리는 날 아침에 주례자가 관자에게 목욕재계하고 몸을 정결히 할 것을 이른다. 관자는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런 다음 집안과 마을 어른들이 계시는 마루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자식이 관을 쓰게 되었음을 고한다. 그런 다음에 집안 어른들과 함께 합석하여 관자의 댕기를 풀어준다. 그리고 머리를 빗기고 올려서 상투를 튼다. 제일 연장자가 관자에게 망건을 씌운다. 이어 근친자가 관을 씌운다. 관을 쓴 관자는 다시 사당에 가서 성인이 되어 관을 쓰게 되었음을 고하는 관례 고사를 올린다. 사당에서 나온 관자는 주례자와 어른들께 차례로 인사를 올린다. 이때 자를 지어주기도 하고, 이후에 서당의 선생님이 자를 지어주기도 한다. 관례를 올리기 위하여 망건, 빗, 갓, 술, 대추, 밤 등을 가져다 놓고 관례상을 차린다. 또 관자의 머리를 빗길 때 사용할 물을 세숫대야에 떠다 놓는다. 관례할 때 입었던 옷은 혼례에 입는 대례복과 같다고 한다.


여성의 성인의식 계례
조선 시대에는 『가례(家禮)』의 영향으로 여자 나이 15세를 전후하여 쪽을 짓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했다. 계례는 혼인이 정해지면 하는 것이었으나, 만약 15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못하면 자기 집안의 제부 중에서 한 사람이 계례를 거행했다. 비록 계례를 행했더라도 결혼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처녀 때의 귀밑머리로 되돌아갔다. 실제 계례는 남자의 관례만큼 보편화되지 못한 듯하며, 계례는 혼례 속에 흡수되어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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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례는 혼례를 하기 전에 여자가 쪽을 틀고 비녀를 꽂는 것을 말한다. 계례는 혼인이 정해지면 하였다. 하지만 15세가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경우에는 15세에 계례를 행하였다. 혼례로 성인의식을 대신하였으므로 혼례 전에 계례를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자의 관례에 빗대어 계례를 ‘여자관례’라고도 한다.

『가례』에 따르면, 여자는 시집가게 되면 계례를 한다. 그런데 15세가 되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를 비롯한 여성들로 하여금 계례를 거행하게 한다. 계례를 행했더라도 허혼이 되지 않으면 쪽을 찌지 않고 땋은 머리로 되돌아간다.

여자가 15세에 계례를 행하는 것은 여성은 음(陰)이고 15라는 숫자가 양(陽)이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달은 15일이 되면 둥글어지는데, 그에 맞춰 여자 나이가 15세에 이르면 계례를 올리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례가 실제로 어느 정도 거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여성의 계례는 남자의 관례보다는 보편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관례와 달리 혼례에 흡수되어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하(1641~1721)의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에서는 계례를 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였고, 이세구(1646~1700)의 『양와집(養窩集)』에서는 계례를 오랫동안 행하지 않아 이미 풍속이 되었고, 계례를 행하더라도 혼례가 임박했을 때 한다고 하였다. 즉, 혼례를 치르기 전날에 처녀의 머리를 풀고 이를 땋아 틀어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아주는 식으로 계례를 행했던 것이다.

계례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례의 주인은 어머니이다. 계례도 관례와 마찬가지로 3일 전에 친인척 가운데 부덕하고 현숙한 분을 빈으로 청한다. 주자(朱子)는 혼인 전에 계례를 하는 경우는 여빈(女賓)을 모시지 않는다. 대신 자기 집안의 제부(諸婦) 중에서 한 사람이 계례를 행한다고 하였다.

계례 당일이 되면, 계례에 필요한 배자와 관[족두리], 비녀를 준비하고, 계자는 두 갈래머리를 하고 당의를 입는다. 빈이 이르면 주인은 맞아들여 당에 오른다.

계자가 먼저 두 갈래머리를 풀어 합발(合髮)하여 쪽을 만들면, 빈은 축사하고 관을 씌운 다음 비녀를 꽂아준다. 축사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를 생략한다.

이어 초례(醮禮)를 한다. 빈이 먼저 술 한 잔을 내린다. 술을 내리는 것은 관례와 마찬가지로 어른이 된 것을 인정하고 축하한다는 뜻이다. 빈이 한 잔을 주면 받아 마시고, 반배(返杯)는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계자에게 자를 내려준다. 계례를 마치면, 주인은 계자를 데리고 사당의 조상님을 뵈온 후에 친척과 빈을 대접한다.

남자의 관례는 관과 의복을 세 번 갈아입는 삼가례(三加禮)인데 비해 여자의 계례는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고 관은 족두리를 씌우며 의복은 당의나 배자를 한 번 갈아입는 단가례(單加禮)였다. 여자의 계례는 남자에 비해 매우 간소하게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5월 14일 성년의 날을 하루 앞두고 강원도 홍천군에 있는 홍천향교에서 "제27회 홍천 전통 관․계례식"을 거행하였다. 홍천향교와 청년유도회는 1991년부터 성년으로서의 사회적 책무와 마음가짐, 그리고 예절을 알 수 있도록 전통 성년례 행사를 열고 있다. 홍천의 전통 관․계례식‘은 홍천향교에서 홍천의 전통문화와 한국의 고유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어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인식하는 의례로 기획 재현되었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 의식인 자관자례

자관자례는 관례와 계례에서 마지막 단계에서 행해졌다. 주례자인 빈이 관자 혹은 계자에게 주는 자는 당사자들에게 그 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자관자례는 성인이 되는 시점에 당사자들에게 새로운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기성 사회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합의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관자례(字冠者禮)는 관례와 계례를 행할 때 관자(冠者) 혹은 계자(筓者)에게 자(字)를 지어주던 의식이다. 『예기』에 “남자는 20세에 관(冠)을 쓰고 자(字)를 짓는다.”라고 했다. 사람은 태어나면 이름[名]를 얻게 된다. 이름은 그 사람에게 어울리기를 바라고 지어주는 것이라면, 자(字)는 관자 혹은 계자가 그 이름에 어울리기를 바라면서 주례자인 빈(賓)이 지어주는 것이다. 빈이 관자 혹은 계자에게 자를 지어주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라는 빈의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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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관지례는 관례의 시행 단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관례를 행할 때 삼가례와 술 한 잔을 내리는 의식인 초례를 마친 후에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자관자례이다. 빈은 층계를 내려와 동향하고, 주인은 층계를 내려와 서향한다. 그러면 관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서 조금 동쪽으로 가서 남향한다. 빈이 자를 지어주는데, “백○○○보[보(父)는 보(甫)이니, 남자의 미칭(美稱)이다]”라고 한다[둘째면 중(仲), 셋째면 숙(叔), 막내면 계(季)]. 그러면 관자는 “○○○가 비록 불민하오나 감히 밤낮으로 공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관자가 절할 때 빈은 답절하지 않는다.

관자에게 자를 지어주면서 “빈이 혹 따로 글을 써서 자를 지어주는 뜻을 일러주는 것도 좋다. 예의를 갖추어 좋은 달 길한 날에 너의 자를 밝게 고하노라. 이 자는 매우 좋아 모사(髦士: 뛰어난 선비)에게 마땅하고 크게 어울리니 길이 간직하여라.”와 같은 축하의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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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례의 경우에도 자관자례를 행한다. 계자에게 족두리와 비녀를 꽂아주고, 이어서 술 한 잔을 내리는 초례 의식이 끝나면 바로 자관자례를 진행한다. 빈과 주인이 함께 층계를 내려간다. 주인은 동쪽, 빈은 서쪽으로 내려간다. 계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며, 조금 동쪽으로 남향해 선다. 빈은 축사하고 ‘○○’라고 자를 말한다. 그러면 계자는 네 번 절하고 빈은 답절하지 않는다. 계례의 축사식은 남자의 자관자례 축사식과 동일하다. 다만 ‘모사(髦士)’ 대신에 ‘여사(女士)’로 표현이 바뀐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관자례는 술로써 예를 행하는 정화의례가 끝나고 난 다음에 시행되는 셈이다. 빈의 축사식이 끝나면 전통성년례는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2017년 5월 15일 오후 2시에 국립 경상대학교는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예절교육관에서 지역의 원로 유학자와 교직원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28회 전통 관례ㆍ계례식을 시연했다. 이상경 총장은 단과대학 학생회를 대표하는 학생에게 직접 자(字)를 내렸다. 15일에 시연된 전통 관례ㆍ계례식은 우리의 한옥에서 전통 방식으로 거행되어 이번 행사에 참가한 학생과 참관자들에게 전통문화의 소중함과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관의례는 관자 혹은 계자에게 성인 내지 인격체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마지막 단계에 행했던 의례였던 것이다. 관자 혹은 계자에게 새로운 이름인 자를 주는 것은 당사자들이 성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관자례는 성인이 되는 시점에 당사자들에게 새로운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기성 사회로의 통합을 의미하는 통합의례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상민(천민)의 성년식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성년식의 시련은 다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외줄 새끼에 매달려야 했고, 양주 지방에서는 백운대 정상에 있는 낭떠러지를 뛰어 건너야 했다. 그리고 호남 지방에서는 무거운 들돌을 들어야 했고, 개성 지방에서는 바위를 안고 혹은 등지고 돌아야만 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성인이 갖추어야 할 힘과 담력, 용기와 인내 등을 시험한 것이다. 이러한 시련을 통과함으로써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인의 자질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일반 서민들은 성인으로 인정받느냐의 여부에 따라 받는 품삯이 달라졌다.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성인으로 대접받아 품삯이 반값에서 온 값으로 오르고, 품앗이도 반품에서 온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생계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집회장인 사랑방을 출입할 수 있는 권한도 얻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마을 밖 숲이나 정자나무에는 사시사철 외줄 새끼가 매어져 있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마을 총각들은 이 외줄 새끼에 매달려 맴춤 시련을 겪어야 했다. 외줄 새끼에 성인이 되고 싶은 총각이 매달리면 새끼를 마구 꼬아 맴돌게 한다. 거기에 더해 외줄 새끼를 밀어 좌우로 흔들기까지 한다. 맴춤 시련 끝에 현기증이 나서 땅에 떨어지면 다시 타야만 했다. 첫째 맴은 화투의 달수에 따라 송학맴, 둘째 맴은 매화맴, 셋째 맴은 사꾸라맴이라 불렀다. 이 세 맴까지 비틀거리지 않으면 성인으로 급제를 하게 된다. 급제하면 참레라 하여 술상을 차려 선배 장정들에게 술대접해야 한다.

참례 끝에 총각은 장정 대접을 받고 이전에 받던 품삯이 반품에서 온품을 받으며 호칭도 생원․주사 등 경칭이 붙는다. 그러나 이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거나, 이겨냈더라도 너무 가난하여 참례 음식을 장만하지 못하면 늙어도 아이 취급을 받았고 품도 반품이었다. 동네 아이들의 반말 놀림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딸을 주려 하지 않아 보통 홀아비로 늙기 마련이었다.


지역별로 행해졌던 성년식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주 지방에서는 백운대 정상의 뜀 바위가 있다. 지금은 쇠다리가 걸려 있는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를 성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함성을 지르며 세 번 건너야 했다. 양주 지방의 수심가 가운데 이 뜀 바위의 함성 소리를 못 듣고 내려오는 어머니와 낭자의 처량한 심정을 읊은 대목이 있다.
경기도 개성 연북면 북사리로 뻗은 천마산 기슭에는 ‘안돌 바위’와 ‘뒤 돌이 바위’가 있다.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에 위태롭게 얹어 놓은 듯한 기이하게 생긴 바위이다. 개성 사나이들은 이 안돌이 바위를 안고서 돌고 뒤 돌이 바위를 등져 돎으로써 성인의 자질을 증명해야 한다.

호남 지방에서는 정자나무 밑에 돌들을 놓아두고 그것을 들어올려야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무거운 들돌을 들고 와들와들 떨고 있으며, 성인식의 집사가 와서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의 바지를 걷고 종아리를 쳐댔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식이 따르고, 그 의식에는 성인이 갖추어야만 하는 힘과 담력, 그리고 용기와 인내를 테스트하는 시련이 뒤따랐던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농촌마을의 성년식 진새례
진새례는 농가에서의 성년식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유두, 백중 등 한여름의 명절에 15~20세의 청년이 한 명의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리이다. 힘을 측정하는 들돌들기가 이루어지고, 아들이 진새례에 참가하는 집안에서는 술과 음식을 대접해 마을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여기서 들돌들기에 성공하면 이후부터 그 청년은 온전한 한 명 몫의 품삯을 받게 된다.

진새례는 매년 마을 단위로 치뤄지는 일종의 성년식이다. 특정 나이를 정해둔 마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15~ 20세의 아들을 둔 집에서 아들이 충분한 일꾼으로써 일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진새례를 치른다. 진새례는 주로 유두・칠석・백중 중에서 하루를 골라 치른다. 명절에 하지 않고, 부잣집을 골라 마지막 논매기를 하고나서 풍장놀이와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한여름에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진새례를 치르는 아들이 있는 집에서 술 한 말과 안주 등을 준비한다. 마을에 여러 명의 해당자가 있으면 그만큼 술과 안주가 많아진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정자나무나 마을회관에 모이면 진새례를 치를 후보자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마련해 준 술과 안주를 내놓는다. 흥이 나도록 농악을 울리거나 들돌놀이를 함께 하기도 한다. ‘들돌’이란 마을에서 남자들의 힘을 측정하는 돌이다. ‘들돌놀이’는 마을의 들돌을 후보자들이 마을에서 정한 규칙에 맞춰 들어 올리는 것이다. 들돌을 일정하게 들어올려 통과하면 그때부터 온전한 어른으로 인정을 받고, 온 품삯을 받게 된다.

진새례는 성년의례로 통과의례적인 성격을 지닌다. 양반집에서는 관례를 치러서 성년식을 올리는 반면 일반 농민들은 마을에서 인정하는 진새례를 치름으로써 온전한 한 명의 어른이 된다. 그러므로 진새례는 양반집의 관례와 비슷한 성년식의 의미를 띤다. 진새례에 술과 안주를 내놓기 때문에 ‘진새턱’ 또는 ‘진새내기’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따라서는 ‘진사례’ 또는 ‘진사턱’이라고도 한다.

‘진사’라는 말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과거 시험에서 소과(小科)에 급제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과 또는 문과 시험을 보아서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서는 ‘소과’라는 일종의 예비고사를 반드시 통과하여야 했다. 이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라고 불렀는데 농부들 사이에서도 진새례를 치른 사람은 본격적으로 어른들로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하며, 두레를 낼 경우는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진사 취급을 한 것이다.

진새례는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부지역에 전승되는 풍속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농경지가 넓어 과거부터 인구밀도가 높았다. 또한, 논농사의 비중이 높아 남성 노동력이 집약적으로 요구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두레를 내거나 품앗이를 하려면 일정한 자격 또는 교환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일종의 성년식으로 진새례가 이루어졌다.

특이한 지역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곳은 전라남도 여수다. 여수에서는 성년기 농촌마을의 성년식을 ‘손두둠’이라고 불렀다. 여수에서 ‘진새례’는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아이가 만 1살, 3살, 5살, 7살이 되는 때에 진세턱을 냈다. 진세잔치를 해야만 집안의 아이가 유아기를 건강하게 잘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충청도의 들돌들기
들돌들기는 마을의 남자들이 명절에 즐기는 놀이이자 통과의례이다. 어린 머슴들이나 두레의 막내인 소동들이 한 명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과정이었다. 들돌은 일반적으로 마을 내에 당산나무 아래나 장자집 마당 등 1, 2개 많으면 7개까지 있으며, 평상시에도 힘을 기르기 위해 많이 이용한다. 충청남도 논산시에서는 백중날 이루어지며,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사용되는 들돌은 완전한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무게는 쌀 한 가마니 정도이다.

돌의 항구불변성을 옛날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과 영험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돌은 주술적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풍양, 내세, 현세의 축원을 위해 돌멘, 선돌, 열석 같은 암석 제례가 있어왔다. 들돌은 주로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 있는데 노두목, 정자, 당집, 선내(船內), 장자집 마당 등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각 마을마다 들돌을 1~3개 정도 가지고 있었고, 많으면 5~7개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들돌은 견고하고 무겁다. 큰 들돌은 젊은이들이 지면에서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의 무거운 돌이고, 작은 들돌은 쌀 한 가마의 무게로 어깨 너머로 넘기기를 할 수 있는 정도이다. 마을 제단인 당집에 있는 들돌은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선 정월대보름이나 유두, 칠석, 백중, 추석 등의 명절에 들돌들기를 했다. 충청남도 논산시에서는 마을의 들돌을 들어야만 한 명의 온전한 장정으로 인정받는 풍속이 있었다. 논산의 들돌들기는 주로 백중날 이루어졌다. 백중은 농민들이 힘겨운 농사일에서 쉬어가는 날로 흔히 머슴날이라고도 불렀다. 백중날 쉬면서 힘자랑을 하고,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장정으로 인정받았다. 돌은 마을마다 다소 다르지만 대체로 쌀 한가마니 정도의 무게로, 이 돌을 등 뒤로 넘길 수 있어야 했다. 논산 들돌들기의 특징은 들돌들기를 신앙의 대상을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들돌들기는 논산에서도 드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상월면 대명리와 노성면 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다.
제주도의 성년식, 무거운 돌을 들어 힘을 겨루는 제주 뜽돌들기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민속놀이로 남자들의 힘겨루기 놀이다. 뜽돌들기는 내륙에서의 들돌들기와 유사한 형식이라 성년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크고 무거운 돌을 얼마나 높이 드는지, 얼마나 오래 드는지, 얼마나 이동하는지에 따라 승부를 겨룬다. 1950년대 전후로 사라져 현재는 전승하는 마을이 없고, 다만 제주도의 체육대회나 축제에서 활용되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대보름날이나 추석, 또는 농한기 때 마을의 젊은 장정끼리 무거운 돌을 들어 힘겨루기를 하였는데 이를 ‘뜽돌들기’라고 한다. 뜽돌들기는 내륙에서의 들돌들기와 같은 말이다. ‘들돌’은 들어올리는 돌이란 뜻으로 ‘듬돌’·‘들름돌’이라고도 부른다. 이 말이 동화되어 ‘등돌’·‘뜽돌’로 변화하여 제주도에서는 뜽돌들기라는 명칭이 된 것으로 추측한다.

옛날 머슴들은 힘겨루기를 통해 품삯을 정하기도 했고, 농촌에선 힘겨루기가 청소년들의 성년식이었다. 이런 통과의례가 하나의 민속놀이로서 발전한 것이다. 뜽돌은 바닷가나 냇가에서 원형에 가까운 무거운 돌을 구해서 사용한다. 힘센 청년들도 쉽게 들어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돌이어야 한다. 뜽돌은 보편적으로 마을 어귀나 정자나무 아래에 보관하고, 놀이도 돌을 보관한 장소에서 진행한다.

뜽돌들기는 힘겨루기 놀이로, 뜽돌을 들어올리는 정도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방식이다. 승부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두 손으로 들어올리는 정도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2. 돌을 든 다음 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뜨리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3. 돌을 들고 배에 붙인 다음 허리를 얼마나 폈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4.돌을 들고 허리를 편 후 가슴까지 얼마나 올렸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5. 돌을 들고 얼마나 걷느냐에 따라 승부를 결정한다.
6.돌을 들고 마을의 일정한 지점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힘을 겨룬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여섯가지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돌을 들고 일정한 지점까지 이동하는 사람이 가장 힘센 장사로 인정받는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2~6개 정도의 뜽돌을 마련해 놓고 종종 뜽돌들기 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웃 마을 청년들과 건전한 힘겨루기를 통해 사이가 돈독해지곤 했다. 1950년대 전후로 서서히 사라져서 현재는 뜽돌들기를 하는 마을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읍·면단위 체육대회 혹은 탐라문화제, 들불축제와 같은 축제에서 뜽돌들기 경주를 열어 전통을 잇고 있다.



어른이 되어 내는 음식과 술, 진세턱

일반적으로 16~20세가 된 사람들이 노동력을 인정받기 위해 마을에 있는 들돌을 들어올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명의 어른으로 인정을 받고 축하를 받으면 음식과 술을 대접한다. 이를 진세턱이라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꽁배술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바쁜 농사일이 마무리되는 7월 칠석이나 백중에 이루어진다. 주로 논농사가 많이 이루어지는 남부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두레를 따라다니며 일을 하는 어린 사람을 소동(小童) 또는 꽁배라고 부른다. 소동은 화톳불 나르기, 소 돌보기, 각따귀 쫓기 같은 잡일을 한다. 소동들이 16~20세쯤 되면 신입례(新入禮)를 통해 두레에 참여하게 된다. 신입례는 대개 마을의 동수나무나 정자 아래 놓인 들돌을 들어올리는 들돌들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들돌을 번쩍 들어올려 온전한 일꾼으로 구실할 수 있음이 확인되면 두레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들돌들기에 성공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며, 축하에 대한 화답으로 술을 낸다. 이렇게 내는 술을 진세턱 혹은 진세내기라고 한다.

두레에 들어가는 청소년을 진세, 진서라 부르기 때문에 두레에 내는 술을 진서술이라고 부른다.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전라남도 여수에서는 ‘손더듬’, 충청도에서는 조무래기라는 뜻의 ‘꽁배’라고 부른다.

진세턱을 내는 시기는 7월 ‘두레먹기’ 쯤으로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보통 백중이나 칠석 무렵에 이루어진다. 시기적으로 7월은 세번의 김매기를 마친 후이기 때문에 날을 잡아 하루 동안 신나게 노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세턱을 낸다. 진세턱을 통한 신입례는 양반층의 관례(冠禮)와 대비되는 농민들의 성년식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은 노동력을 상징할 수 있는 힘, 육체적 노동 능력에 대한 검증을 통해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에 들어가 온전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진세턱은 일반적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등 남부지역에 전승되는 풍속이다. 남부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농경지가 넓어 예전부터 인구밀도가 높았고, 논농사의 비중이 비교적 많아 남성 노동력이 집약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또 두레를 내거나 품앗이를 하려면 일정한 자격 또는 교환 조건이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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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