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하고 순박한 소처럼

1950년 9월 28일 수복을 앞두고 월북한 그는 조선화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공훈예술가, 198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북한미술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우직하고 순박한 소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속을 소두 마리가 서로를 의지하며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73년 전인 1948년 12월, 기축년(己丑年)을 앞두고 서울 동화화랑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 정종여가 그린 <기축도(圖)도 1)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해방기 미술이 북한미술로 이어지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01. 정종여, (己丑E) 1948, 출처 : 「서울」, 1949. 3. 28    02. 정종여, 우시장) 1940년대 초, 엽서화, 소재 미상




수묵화에 담은 소의 우직함

시인 박인환은 <기축도>를 보고 “동양화가 가지고 있는 봉건정신을 위기에서 구출한 최초의 용사(勇士)”이며 이 개인전이 “금년도의 최대 수확”이라고 극찬했다. 미술평론가 박문원은 1948년 화단의 동향을 정리하는 자리에서 “중견들의 새로운 진출을 의미하는 작품” 중 하나로 언급하였고, 시인 이수형은 “동물을 빌려서 전체 인민들이 오늘날 체험하고 또 실천으로 맹진(猛進)하고 있는 현실적인 생활감을 약동시켰다”고 평했다. 나아가 이수형은 이 그림을 바탕으로 <기축도>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호평이 쏟아졌지만 아쉽게도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1949년 3월 28일자 『週刊서울』에 실린 흑백 도판밖에 없다. 비록 흑백 도판이지만 해방 후 여러 어려움을 헤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꿈과 힘찬 의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기축도>를 그린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는 1914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정형편으로 경상도 일대의 사찰에서 지내던 그는 합천 해인사 주지 스님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오사카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방학 때면 고국에 돌아와 청전 이상범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렇게 배운 실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고, 해방 후에는 미술단체에서 활동하며 수묵과 채색, 불화 등 다양한 화목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1950년 9월 28일 수복을 앞두고 월북한 그는 조선화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4년 공훈예술가, 198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는 등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북한미술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현재 작품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기축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1940년대 초반 정종여가 그린 <우시장>(도2)을 보면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또는 어딘가를 걸어가는 소의 앞, 옆, 뒷모습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보인다. 정종여와 절친했던 김기창은 정종여가 “늘 방석만한 스케치북을 옆에 끼고 다녔다”고 회고했는데, <우시장>(도2)을 보면 소의 다양한 자세와 형태가 늘 관찰하고 스케치하며 노력해온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탄탄하게 다져진 기량 위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를 가미해 우직한 소의 모습을 수묵으로 극대화시킨 것이 <기축도>다.


03. 정종여,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1958. 종이에 수묵담채, 145x520cm, 평일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사군자와 기명절지를 통해 표현한 생동감 있는 묵색

정종여는 월북 후 소를 소재로 또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인물까지 넣어 더욱 생동감 있고 큰 화면으로 그렸는데, 1958년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에 입상한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도3)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화면구성과 소재, 어떤 난관도 헤치고 앞을 향해 가는 모습이 <기축도>와 유사하다. 폭우가 눈보라로 바뀌고, 5미터가 넘는 대화면 속에 고지를 향해 가는 인물과 말이 추가되었지만, 화면 가운데 부러질 듯 휘어진 나뭇가지와 소를 소재로 한 점이 <기축도>를 연상시킨다. 정종여는 이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를 그리면서 ‘세찬 눈보라를 이겨내며 고지로 향하는 여성들의 심정’도 되어보고, 소의 느린 발걸음을 재촉하며 고삐를 잡아당기는 할아버지의 심정’도 되어보면서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그림은 눈보라 치는 겨울인데,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가 한참 더운 여름이라 인물과 동물을 모델로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소를 모델로 하기가 어려워 조각가 조규봉에게 직접 점토로 소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렸으며, 놀란 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50여 매 이상의 습작을 그렸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우마차 사업소에 가서 말을 때리며 그렸다고 한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화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제작했기 때문인지 이 작품은 북한 화가들에게 조선화의 제작기법을 설명하는데 교과서처럼 중시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종여는 고전들(조선시대 작품)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특히 오원 장승업의 <매화도> 병풍에서 그 기백과 필치와 먹색을, 단원의 <신선도> 병풍에서 구도와 선묘의 구사 등 선조들의 높은 작화 정신을 배우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북한에서 한때 봉건시대 착취계급의 유물로 여겨졌던 사군자와 기명절지를 통해 정종여는 오히려 생동감 있는 필치와 묵색들을 적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창작체험기는 오늘날 북한의 조선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은 남과 북의 미술이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정종여의 작품과 글은 남과 북 미술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04. 정현은 며, 동전 제거호 포지 1049. 3.    05. 정연 (소 관리자 163 목판화, 73x46cm, 개인소장



잡지 표지에 담은 친구 같은 순박한 소

월북작가를 통해 북한미술로 이어지는 모습은 삽화가이자 장정가였던 정현웅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949년 『協同』 제21호 표지화(도4)를 보면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둘러맨 농부가 소와 박자를 맞추며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정현웅은 이렇게 잡지 표지나 소설 삽화에 종종 그리곤 했던 소를 월북 후에도 즐겨 다루었다. 『協同』 제21호 표지 그림은 월북 후, 독일의 캐테 콜비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던 판화 <소 관리공>(도5)으로 재탄생한다.

정현웅의 그림처럼 우리 선조들은 우직하고 순박하며 성급하지 않은 소를 아끼고 사랑했다. 소의 이러한 천성은 은근과 끈기를 지닌 우리 민족의 기질과 잘 융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간에게 헌신적인 동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그림 속 소는 가족같이 친근한 모습이다. 소의 해를 맞이하여 소처럼 우직하게 앞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서로를 아끼고 돕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신수경(평택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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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