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1953년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유적의 변천 과정

관왕묘(關王廟) → 탄보묘(誕報廟)→ 충무사(忠武祠)
1598년(선조 31) 명나라 진린(陳璘) 장군이 고금도에 주둔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중국 촉나라 장군이었던 관우(삼국지 등장인물)를 모시는 관왕묘'를 세웠다. 1666년(현종 7) 동무를 지어 진린과 충무공을 배향하였다. 1713년(숙종 31) 관왕묘비를 세웠다. 이후 서무를 신축하여 충무공을 단독으로 배향하였다. 1781년 (정조 5, 신축년) 임금이 '탄보묘' 편액을 하사하여 사액 묘우가 되었다. 1792년(정조 16) 등자룡(鄧子龍)이 동무에 추배 되었다. 1795년(정조 19) 임금이 이충무공전서를 하사하였다. 1940년 경 일제강점기에 관우 상과 위패 등 유물이 훼손되고 제향이 중단되었다. 이후 1953년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였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3년 관왕묘(탄보묘)의 옛 자리를 '충무사'라 명하고,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었다. 현재 충무사는 정전(사당, 정면 3칸 측면 3간 맞배지붕) 동무(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서우(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동재(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서재(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 관왕묘비각(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59년 동무에 가리포진 첨사였던 이영남(李英男)을 추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수영 전진도첩(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1988년 3월 16일 지정 )

전진도첩은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실태, 어떤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진도 직진도 하방영도 도진도 곡진도 학익진도 일제향전도 열자진도 좌우이로행도 청발방도 군선기호 · 나팔취음 기타 1780년 이전 고수영 작대 1781년 개작대 등이다. 본 자료는 실제 조선후기 우수영이 어떤 조직과 직전을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완도 고금도 관왕묘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 2018년 4월 19일 지정)

1713년(숙종 31)에 건립된 관왕묘비(關王廟碑)는 이이명(李頤命)이 비문을 짓고, 이우항(李宇恒)이 글씨를 썼다. 비는 관왕묘의 건립 시기와 배경 · 유지 관리 과정 등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정유재란을 승전으로 이끌었던 이순신과 진린 장군의 행적을 담은 기록물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충무사 주변 유적지


■ 월송대(月松臺)
충무사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임시로 안장되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 해남도(海南島)
충무공은 이 섬에 허수아비를 세워 군사로 위장하였고, 마름으로 섬을 둘러 멀리서 보면 군량을 쌓아놓은 노적가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던 곳이다.
■ 덕동마을 일대
1598년 2월 17일 충무공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고, 진린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머물렀던 지역이다. 또한 1681년(숙종 7) 고금도진을 설진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폐진 되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금도와 충무공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충무공은 목포 고하도를 거쳐 1598년 2월 17일 완도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완도는 군사적·지리적 요충지이면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방어하기에 적절한 중요한 지역이다. 또한 고금도는 형세가 견고한 요충지이며, 섬 안에는 기름진 농토가 많아 군량미 확보에 용이하며 군선을 제작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따라서 완도 고금도는 7월 16일 조선과 진린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연합전선을 형성한곳이면서, 11월 19일 노량해전을 통해 일본과의 임진· 정유재란 전쟁을 마무리 지었던 뜻깊은 전적지이다.




충무사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충무공이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과 본영을 이곳에 두고 왜군을 크게 무찌른 곳이며,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마친 후 이곳에 영구를 봉안했다가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의 현충사로 옮긴 유서 깊은 곳이다.

충무공은 1597년 8월 백의종군 중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군산 선유도로 다시 팔금도로 가 잠시 있다가 목포 앞 고하도에 진을 치고 그 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1598년 2월 17일 수군 8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고금도 덕동리로 진을 옮겼다.

고금도는 형세가 견고한 요충지이며 섬 안에는 기름진 농토가 많아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므로 충무공은 이곳에 본영을 설치하고 수군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늘리는 한편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조수와 수전에 익숙한 완도 각 진(陣)의 장정을 모집하여 실로 우리나라 초유의 대 수군을 편성했으며, 장군의 무적 수군 재건 확충을 이루었다(충무전서 행록).

또한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군농일치의 정책을 폈으며 염전을 만들어 군염(軍鹽)을 비축했고 옆에 보이는 섬 해남도는 마름으로 섬을 둘러 멀리서 보면 군량을 쌓아놓는 노적가리로 보이도록 위장하고 수많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복을 입혀 등불을 달아놓고 복병을 사방에 배치하여 감히 왜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충무공을 의지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쳐 그들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어 그 당시 고금도 내에 거주한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러 옛날 한산도 시대보다도 오히려 10배나 되었다.

한편 그해 7월 16일에는 명나라 장군 도독 진린이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니 그 군세는 매우 장엄했으며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충무전서 행록).

충무공은 이곳에 머물면서 한편으로는 왜군의 침략을 막고 한편으로는 군사력 증강에 전력했다. 이 무렵에는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러 왜군은 철귀(撤歸)하려고 각처에서 순천지방으로 모여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무공은 왜적을 완전히 섬멸하려고 조명연합함대를 이끌고 이곳을 떠나 순천 예교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한 달 만에 돌아와서 수군을 재정비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한 달이 지난 11월 19일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노량에서 수많은 적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안타깝게 최후를 마쳤다(선조 31년 11월 19일 새벽). 그 후 영구를 이곳 월송대에 83여 일간 봉안했다가 1599년 2월 11일 아산으로 옮겼다.

이곳은 충무공의 마지막 본영이요, 처음으로 조명연합전선을 형성한 곳이며, 초유의 대 수군(大水軍)을 이룩한 곳으로서 최후의 전승을 제공한 군사기지 총사령부임과 동시에 전쟁 종국을 가져오게 한 삼도 수군통제영이며, 마지막 영구가 임시 봉안된 곳으로서 길이길이 후손에 물려줄 전승 유적지이다.

충무사 본 건물은 1598년(선조 31) 명나라 도독이 그들의 군신 관왕(關王: 삼국지의 등장인물 관운장)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으며, 1666년(현종 7) 수군 절도사 유비연(柳斐然)이 중수하고 동무에는 진린, 서무에는 충무공을 모시고 암자 옥천사(玉泉寺)를 지어 중 천휘(天輝)로 하여금 사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모시게 했다.

현종 임금 때는 경칩과 상강 두 차례에 걸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6개 부군현 관원들이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모셨으며, 정조 임금은 탄보묘(誕報廟: 큰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시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군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모시게 했다(충무전서).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는 민족정신말살정책에 의해 관왕상과 위패를 비롯하여 유물(투구, 서적, 벽화, 현판) 일체가 철거 및 유실됨과 더불어 사당은 퇴락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충무사 현판을 걸고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한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다시 충무공을 정전(正殿)에 모셨으며, 1959년에는 충무공의 보좌관인 조방장이며 당시 가리포 첨사 양성인 이영남(李英男)을 동무에 모시고 매년 4월 8일(양력) 탄신기념제와 11월 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봉행하고 있다.
또한 1960년 1월 29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하고 여러 차례 보수하고 주민의 협조로 암자 옥천사를 분리하여 이전하고 담장을 둘러 오늘의 경관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곳은 정유재란 이후 이충무공의 최대의 삼도 수군통제영이며 노량해전 전승 및 임진왜란 종전 제공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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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