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운반선 봉황호 복원, 전통 항해의 돛을 펴다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은 예부터 옹기 생산지로 유명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옹기를 굽고 팔러 다니는 것이 마을 주민의 주된 소득일 만큼 옹기 생산이 활발했다.

옹기운반선 봉황호 복원, 전통 항해의 돛을 펴다

강진군 칠량면 봉황마을은 예부터 옹기 생산지로 유명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옹기를 굽고 팔러 다니는 것이 마을 주민의 주된 소득일 만큼 옹기 생산이 활발했다. 그 때문에 많게는 3~4척의 옹기운반선이 한꺼번에 옹기 행상에 나가기도 했다. 봉황마을에는 40여 척의 옹기배가 있었는데, 전남 지역 마을 중 옹기운반선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기도 했다.


01.2013년 신안군 압해도 해상을 항해하는 봉황호

봉황마을의 역사와 함께한 옹기운반선

봉황마을의 옹기운반선은 장흥, 완도, 고흥, 여수 등 남해안과 멀리 제주도, 부산, 포항까지 다니며 옹기를 공급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정보와 문화를 전파하면서 도서 해안의 생활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옹기 수요가 감소하고 플라스틱, 유리 용기 등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2010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970년대 봉황마을에서 실제 운용되었던 옹기운반선을 모델로 하여 봉황호를 복원하였다. 봉황호의 원형을 파악하기 위해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던 중 당시 옹기운반선을 건조했던 고태랑 도목수와 배를 운항했던 신연호 사공을 만나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복원된 봉황호는 선수가 뾰족하고 선체 중앙이 넓은 화물선으로 그 크기는 길이 18m, 너비 5.9m, 깊이 1.9m, 총톤 수 19t 규모이다. 선수부터 야후돛대, 이물돛대, 허리돛대 등 세 개의 돛대가 세워져 있고 허리돛대가 약 16m로 가장 높다. 선미 좌우에 두 가닥 노가 걸어지는데, 포구에 접안하거나 이안할 때 쓰이는 용도였고 바다 복판에서는 주로 돛을 이용해 항해했다.

중앙의 한장(허리칸)과 상부널(요두마)에 3,000여 점에 이르는 크고 작은 옹기를 선적할 수 있으며, 옹기 사이에는 볏짚 등을 넣어 부딪혀 깨지지 않도록 했다. 선수에 투시칸이라고 하여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등 식사 준비를 하는 공간이 있었고, 선미 갑판 아래에 잠을 자는 선실을 두었다. 옹기운반선에선 배가 크든 작든 사공이 ‘왕’이었고, 행선지부터 옹기 판매까지 모든 책임을 졌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없었다. 사공을 보조해서 ‘웃동무’, ‘화장’이 함께 다녔으며 화장은 밥과 청소, 빨래 등 배 안의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막내가 주로 했다.


02.1980년대 봉황마을 포구에 메어져 있던 옹기배

03.2016년 시하바다로 나가기 위하여 연구소 계류장 을 나서는 봉황호의 모습



옛 배의 복원, 옛 항해술의 복원

2010년 약 3개월에 걸친 배짓기 작업이 완료되고 그해 9월 정윤석 옹기장의 옹기를 비롯한 봉황마을 옹기를 실은 옹기운반선이 40여 년 만에 남해로 향했다.

봉황마을에서 출발한 옹기운반선은 평일도(平日島), 외나로도(外羅老島), 여수 소호동 요트장을 거쳐 여수구항(이순신광장)까지 4일간 남해를 항해했고 여수구항에서 옹기장터가 다시 한 번 열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0년 강진 옹기운반선 해상로드 탐사 항해를 시작으로 2019년까지 봉황호를 활용해 다양한 항해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전통 항해 및 현대 요트 항해 전문가로 이뤄진 항해단을 구성했으며 전통 선박과 전통 범장(帆檣)의 성능, 항해기록을 수집·연구해 오고 있다. 이를 위해 매년 시하바다 해상을 전통 범장 항해(돛과 돛대를 이용한 무동력 항해)하고 GPS 트래킹 데이터를 수집하여 풍향, 풍속, 물때 등 항해 환경에 따른 항해 성능을 비교·연구하고 있다.

04. 2010년 9월 여수구항 (이순신광장)에서 40여 년 만에 열린 옹기장터



돛단배는 엔진이 달린 동력선과 달리 바람과 조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있으며, 목적지까지 반듯이 가지 못하고 한참을 빙 돌거나 지그재그로 갈 수밖에 없다. 물때는 바람보다 맞추기 쉽지만 못 맞췄을 때는 바람이 아무리 좋아도 손해보기 십상이다. 그래서 옛 사공은 바람을 잘 보고 물때를 잘 맞출 줄 알아야 “배질 잘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매년 시하바다 해상을 항해하고 그에 따른 풍향, 풍속 등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며 비교·연구하는 것은 그 옛날 사공들이 배질을 어떻게 했는지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범장의 성능이 어떠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중요연구였다.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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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