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당시, 군번 없는 용사들

전쟁으로 인한 가족해체와 비극

영화 '군번 없는 용사(1966), 전쟁으로 인한 가족해체

1966년 개봉된 「군번 없는 용사」는 「7인의 여포로」에 대한 보상으로 제작된 이만희의 반공영화이다. 게릴라 부대 대장인 형(신영균)과 북한군 장교인 동생(신성일) 사이에서 아버지(최남현)가 작은아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처형되는 가족 해체의 절대 비극을 그리고 있다.

1966년 「군번 없는 용사」는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하였다. 시나리오는 한우정, 감독은 이만희로 신성일, 문정숙 등이 출연했다. 상영시간은 121분이다. 1950년대, 6·25전쟁을 배경으로 분단의 슬픔과 분단 가족의 갈등을 그린 전쟁영화이자 반공영화이다.

 

군번없는 용사 포스터(사진출처:영화진흥위원회)



1950년, 영호(신영균)와 영훈(신성일) 두 형제는 6·25 전쟁 전장의 중심에 있다. 형 영호는 마식령산맥 일대에서 유격대를 지휘하는 대장으로 활동하고, 동생 영훈은 인민군 보위성 보위부 소좌로 일한다. 영호의 아버지(최남현)는 그의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 영훈이 훈장을 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가족들은 영훈의 귀향을 환영하면서도 그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한다. 한편 보위부 마부장(허장강)은 이들의 상황을 눈치 채고 있던 중, 수송물자가 반공유격대에 의해 번번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훈의 생일날, 영호가 찾아오고 마부장이 그를 의심하자 영호는 마부장의 아내인 유리(문정숙)를 인질로 삼고 도망친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오래전 사랑하다 헤어진 사이였고 영호는 그녀를 놓아주고 만다. 하지만 보위부 마 부장(허장강)은 영호와 아버지를 반동분자로 몰아붙이고 영훈의 손으로 아버지를 처단하도록 한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영훈은 형이 지휘하는 유격대로 자수하러 갔다가 유격대원의 공격으로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형의 가슴에 안겨 북한의 보급창 기밀을 알려주고, 아버지를 살해한 자식은 자식일 수 없다며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영호와 어머니(황정순), 동생 영옥(전영선)은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슬퍼한다.

「7인의 여포로」로 구속 수감된 뒤 약 3개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만희 감독은 ‘반공영화’를 제작하고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고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다시 전쟁영화인 ‘반공영화’ 「군번 없는 용사」를 제작, 영화계로 복귀한다. 피아와 선악의 구분이 분명한 반공영화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다. 북한군 장교역의 배우가 ‘너무 잘생긴 남자’라며 감독의 ‘불순한’ 의도를 물었고, 영화에 나오는 북한군의 복장이 너무 멋있다는 것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가 자신의 친아버지를 반동이라고 처단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였다고 해서 심의를 통과한다.

시나리오는 한우정의 것으로 니콜라이 고골리의 ‘타라스 불바 Taras Bulba’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는데, 「군번없는 용사」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데 반해 미국영화 ‘타라스 불바’(1962, 한국명 : 대장 불바)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

영화 「군번 없는 용사」는 웅장한 전쟁장면 연출의 최고봉으로 불리던 이만희 감독 특유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충무로에서는 배우들이 이 작품을 두고 “최고의 작품이 나왔다”고 칭찬하면서도 “다루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
제5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반공영화 각본상(한우정)을, 제4회 청룡영화상에서 각본상과 남우조연상(허장강)을, 제13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영화 속 장소는 마식령산맥 일대이지만, 첫 촬영지는 서울 충정로의 한 신학대학이었고 그 외에 춘천의 소양강가에서도 촬영되었다.


미군 병력 10만 명을 대신한 군번 없는 용사

6·25전쟁 당시 그 어떤 지휘관보다도 공세적인 공격과 강군 육상을 피력했던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이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말한 10만 병력을 대신했던 이들은 누구일까?

매일 10마일(약 16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고지로 100파운드(약 45kg) 정도의 보급품을 운반하고 되돌아왔던 이들, 밴플리트 장군이 미군 10만 병력을 대신했다고 칭찬했던 이들은 일명 '지게부대'로 불렸던 한국 노무자들이다.


임무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과  보급품 및 식량을 운송하는 한국노무단의 모습들

산악지대 누비는 "A Frame Army"

우리니라는 70%기 산이다.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군 벙크와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기 벌어졌던 지역 역시 대부분 산이다. 그래시 전투전적비, 전승비들 역시 산이니 언덕 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형 탓에 차량으로 수송할 수 없는 군수품을 대신 운송할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쟁 초기 국군은 각 사단별로 피난민이니 인근 마을주민을 노무자 동원하기 시작했고,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 6호에의해 징병 대상자가 아닌 31~40세 남성들이 소집되었다. 이들을 민간인 운반단(CTC Civilian Transport Corps)으로 부르다가 이후 조직을 강화하여 한국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s)으로 창설하였다. 소집 대상은 주로 31~40세였지만 실제로는 10대 소년과 60대노인들도 참전했다.

휴전 때까지 30만여 명의 노무자가 운용되었는데, 이들은 군수품과 보급품 운반은 물론 진지 공사와 부상자 후송, 도로와 교량 보수 등에도 동원되었다. 특히 이들은 험난한 산악지대인 춘천, 화천 등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산악지역에서 군수품을 쉽게 나르기 위한 방법으로 지게를 짊어지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는 '지게부대'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유엔군들은 이들이 사용하는 지게의 모양이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해서 '에이 프레임 부대(A Frame Army)'라고 부르기도 했다.

장마철에는 진흙탕으로 겨울에는 쌓인 산으로

행군 또는 훈련을 할 때 가장 힘들게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바로 군장이다. 완전군장의 무게기 대략 20~30kg 정도인데, 험준한 산을 군인들의 군장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군수물자를 메고 매일 오르내렸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한 장마철이라고 해서 눈이 오는 겨울이라고 해서 전쟁을 멈췄을 턱이 없으니 그들은 장마철에는 진흙탕 길을, 한겨울에는 눈이 쌓여 길도 보이지도 않는 산을 오르내리며 군수품과 식량을 날라야만 했다. 이들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진지가 돌파될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사상자들의 총기와 탄약을 가지고 방어진지에 투입되었고, 때로는 농민으로 위장해 적의 첩보를 입수하여 보고하는 역할도 했다.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한 전장의 모든 지휘관들이 그들을 칭찬해 마지않았을 만큼 그들은 전쟁터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맡았고, 자신들의 몫을 묵묵히 해냈다.

철모는커녕 무명바지나 학생복 등 징집 당시 옷을 그대로 입고 일했던 한국 노무자들. 이들 역시 군인 못지않게 큰 몫을 하였으나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그에 따른 예우가 매우 부족했다. 이들이 임기를 마치고 귀향할 때 가지고 돌아간 것은 징용 해지 통지서와 종군기장, 기차표뿐이었다. 이름도 없이 영광도 없이 오직 애국심 하나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지게부대가 없었다면, 어쩌면 이 전쟁은 더욱 힘겨웠을지 모른다.

애국애민이라는 단어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하겠다'는 국가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의미한다. 조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은 곧 애국심이며, 군인정신의 뿌리와도 같다. 그러나 이런 애국심이 군인에게만 요구되고, 군인만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총 대신 지게를 지고 전쟁터를 오갔던 노무자들의 애국심이 총을 든 군인에 비해 적다고 할 수는 있을까.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들과 같은 군인 참전유공자를 발굴하여 이들에게 맞춤형 지원과 예우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최근 국방부 유해발굴단에 의해 유해가 발굴된 지게부대 故 김아귀씨가 호국영웅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기도 하였다.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볐던 지게부대원의 노고가 수면 위로 올라와 오래오래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길 바란다.   출처 한국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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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