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마음이 아파지는 미리내성지.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어째서 성지 이름이 미리내가 되었을까?
이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알면 알수록 마음이 아파지는 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미리내 성지는 천주교 신자는 물론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소이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어째서 성지 이름이 미리내가 되었을까?
이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1800년대 초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 미리내와 인근 지역 산속에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룬 것이 미리내 성지의 시초이다. 신자들은 곳곳에서 땅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팔며 살았다. 밤이면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수처럼 보여 미리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달빛 아래 흐르는 은하수’, 그곳이 바로 미리내 성지이다. 박해를 피해 온 그들이었기에 가장 중요시한 것은 아침. 저녁으로 모여 기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고된 삶이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이다.


                         미리내 성지를 얘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대건 신부이다.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순교한 김대건 신부는 조정에서 장례마저 치루지 못하게 하여 처형당한지 40일이 지난 다음에야 이민식 빈첸시오 청년과 몇몇 신자들이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을 찾아 미리내까지 옮겨와 안장했다고 한다.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안장 되어 있는 곳이 이곳 미리내 성지이다.

따라서 김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비로소 본당으로 승격됐다.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여명의 신자가 있었다.


103위 시성 기념 성당

주차를 하면 미리내 성지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곳에서 오른쪽을 보면 성체 조배실이 보인다. 성체 조배실 옆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함께 ‘한국 순교자 현양의 발원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옆으로는 천국의 모습을 의미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미리내 성지석과 우측에 성모상과 조배실이 있다



미리내 성지에는 가을이 한참 깊었다


미리내는 1972년부터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고 1989년에 천주교 103위의 시성을 기념하기 위한 대성전이 완성되었다. 성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어는 것은 성지 한 가운데 웅장하게 서있는 기념성당이다. 강하고 견고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이다. 웅장한 외관만큼이나 내부의 웅장한 모습도 보는 이의 뇌리에 강하게 들어온다. 성당은 지하 1층, 지상 2층이며 면적이 3,450m²에 이른다고 한다. 이 성당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참혹한 형벌을 당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 전시장도 있다. 너무 참혹해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며 뒤돌아섰다.

기념성당 뒤쪽으로 난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가 로마병사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받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져 있는 청동조각 15점이 서 있다. 김대건 신부의 무덤과 하악골(아래턱뼈)이 모셔져 있는 미리내성당, 김신부의 동상, 성모성당, 겟세마니 동산(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한 동산)등을 돌아보는데 2~3시간이 소요된다.


성당 이름에서 말하는 103위는 한국인 93명,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주교 3명, 신부 7명을 뜻하며 이들은 1984년 5월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가톨릭 용어, 성인품(聖人品)에 오를 때에 드리는 예식)을 통해 복자(福者)(가톨릭 용어, 죽은 사람의 덕행과 신앙을 증거하여 공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발표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에서 성인(聖人) (가톨릭 용어, 교회에서 일정한 의식에 의하여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선포한 사람)의 품위에 오르게 된다.

103위 시성 기념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그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경당이 나온다. 경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상이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해 무엇하랴. 그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알면 알수록 숙연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경당 


김대건 신부 묘


성체 조배실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성요셉 성당이 나온다. 1906년에 지어진 이 성당은 교인들이 성당에 올 때 하나씩 들고온 돌을 모아 벽을 쌓았다고 한다. 경당에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내부에는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 가톨릭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김 신부의 묘역에는 한국 천주교의 3대 주교인 페레올 주교와 미리내의 첫 주임신부인 강도영 마르코 신부, 3대 최문식 베드로 신부 등의 유해가 석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하나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성요셉 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 속에 십자가가 보인다. 겟세마니 동산과 무명순교자 묘지로 가는 길이다. 겟세마니 동산은 예루살렘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인데 예수는 이 동산에 올라 가끔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미리내 성지 겟세마니 동산에는 예수가 휴식을 하시는 모습을 동상으로 꾸며 놓았다.



다가오는 서양세력에 따른 국가적 위기와 그 속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천주교 박해. 그 박해 속에서 목숨을 잃어간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 미리내 성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한 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 김대건 1822~1846(순조22 ~ 헌종12)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신부, 천주교 성인. 교명 앙드레. 본관 김해. 충청 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 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국어를 익히었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 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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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