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벼슬 있는 자로소이다

나는 벼슬 있는 자로소이다

 

신분제의 상징이 된 의복 衣服 7세기 당(唐)의 태종이 정관연간에 통일 제국을 다스리고자 편찬케 한 『양서(梁書)』, 『진서(陳書)』,『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수서(隋書)』 가운데 『주서(周書)』에는 고구려에 대해 ‘벼슬이 있는 사람은 관 위에 새의 깃 2개를 꽂아 뚜렷하게 차이를 나타낸다’라고, 백제에 대해 ‘조회나 제사를 지낼 때는 관의 양쪽 곁에 새의 깃을 덧달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서(隋書)』에도 ‘백제에서는좌평으로부터 장덕까지는 자색 띠, 시덕은 검은 띠, 고덕은 적색 띠,계덕은 청색 띠, 대덕 이하는 모두 황색 띠, 문독으로부터 극우까지는 모두 백색 띠를 사용하다. 관에 대한 제도는 모두 같다.다만 나솔 이상은 은꽃으로 장식하다’라거나 ‘신라의 의복이 고구려나 백제와 유사하다’고도 했다.

 

01.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인 장회태자의무덤 벽화 <장회태자묘예빈도(禮賓圖)>에 그려진

신라 사신으로 추정되는 인물 ⓒ문화콘텐츠닷컴            02.당태종의 용포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된 의복

< 양직공도(梁職貢圖)>는 521년 중국 양나라에 조공하러 온 외국 사신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문헌에 나오는 문자만으로 파악하기 힘든 6세기 중엽 삼국 복식의 일면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귀한 회화 자료 중 하나다. 왕회도(王會圖) >에서도 역시 7세기 초 긴장된 역학관계에 놓였던 삼국 사신들의 차림새를 통해 상층부를 이루던 귀족 사회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예리한 독자라면 신라 사신은 상대적으로 용모가 젊고 관모 역시 고깔형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구려 사신은 벼슬이 있는 자를 상징하는 듯 2개의 새 깃 장식에 북방의 호방한 기상을 연상시키는 문양이 들어간 상의를 입고 있다. 백제 사신의 경우 소매 양쪽에 정제된 문양과 함께 무릎 아래로 이르는 도련선이 물결치듯 둘러져 있고 전체적인 실루엣에서 남조 문화의 영향을 받은 듯 여유로움과 관활함이 느껴진다. 앞서 살핀 문헌에서 언급된 것처럼 회화에 나오는 삼국의 사신들이 입고 있는 차림새가 디테일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으나 전체적인 실루엣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즉, 세 명의 사신이 입고 있는 상의는 무릎 근처에 이르는 길이에 모두 깃이 곧고, 좌측에서 우측 겨드랑이 아래로 깊게 여며서 허리에 대(帶)를 대어 묶어 입는 직령교임(直領交) 식의 착용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고대국가에서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보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스타일 또는 차림새였다. 다만 지배층을 이루던 귀족이나 관료들은 의복이나 관모 같은 부속품을 색상이나 재질, 규모에서 서민과는 절대적인 차등을 둠으로써 그들이 속한 신분이나 사회적 위계를 가시화하는 수단을 넘어 통치권의 상징처럼 사용해 왔다.

 

03.고종황제의 용포             04.<양직공도(梁職貢圖)>를 모사한 <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에서 찾아볼 수있는

신라ㆍ고구려ㆍ백제(왼쪽부터)의 사신.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한국목간학회

 

소수에게만 허락된 로열 퍼플(Royal Purple)

신분제 사회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도 고가의 명품이나 일반인은 접근이 불가능해 보이는 특수한 상품들을 소비할 수 있는 계층들이 존재하듯이 고대국가에서도 최고의 스타일은 제한된 소수에게만 허락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복식사적 사료 고찰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왕의 복식’이 아닐까 한다. 10세기에 편찬된『당서』에는 ‘백제, 그 왕은 소매가 큰 자색포(紫色袍)와 청색 비단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나직(羅織) 관모에 금꽃 장식을 하다. 흰 가죽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최고 수권자인 통치자의 존재감을 색과 소재, 착용 방식 등에서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관인(官人)들은 모두 비색(緋色)으로 옷을 삼고, 은꽃으로 관모에 장식하다. 일반인들은 비색과 자색을 입지 못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리더들이 착용할 수 있는 색상이 서양의 고대 로마에서도 왕을 상징하던 로열 퍼플(Royal Purple)에 비교할 만한 자줏빛이나 선홍의 붉은빛을 우위에 두고 나뉘며 복색을 통해 권위나 지위의 고하를 분별해 주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 법흥왕 재위 7년(520년)에 반포된 율령에서도 백관은 그 관등의 높이에 따라 자(紫), 비(緋), 청(靑),황(黃)으로 복색이 규정된 것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색복 존비제의 시행 대상이 신라의 수도였던 왕경(王京) 6부의 주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지방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매우 현저했다고 하니, 왕경 6부의 주민들이 신라를 이끌어 가는 주체로서 다수의 관리가 왕경 주민 중에서 선발되었을 것이라는 정황을 추측해 본다면 이해할 만한 조치로도 보인다. 문득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넓게는 서울등 수도권, 좁게는 소위 강남권 주민들이 누리는 첨단의 문화예술이나 사회·경제적으로 차별화된 수혜들이 비록 강요된신분제 사회는 아니나 이미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현상일 수도 있음을 상기해 보게 된다.

 

05.복두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한 사람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해 머리에 착용하는 관모(冠帽) ⓒ국립민속박물관

06. 박기종 관복 일괄(朴琪淙 官服 一括) 문관들이 착용하던 쌍학흉배와 단학흉배 두 가지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어 조선 후기의 공복이었던 단령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

 

통일 제국을 일궈낸 패션, 단령과 복두

7세기 전반은 삼국 간의 대립이 격화한 시기로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자국의 안위를 지키는 한편 삼국통일을 꿈꿔왔다. 이 무렵의 복식문화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은 진덕여왕(재위 647~654년)대에 당나라의 의관제(衣冠制)를 도입한 일이다. 신라 조정의 상층부가 삼국이 유사하게 착용해 오던 상·하 2부제 직령교임식 고유 복제에서 둥근 깃을 하고 있는 단령(團領)에 고깔형(弁形) 관모가 아닌 복두( 頭)를 한 세트로 하는 통일제국 당의 공복(公服)을 전격 채택했던 것이다.

 

통일 삼한(三韓)을 준비해 온 신라 고위층의 패션이 드라마틱하게 변화를 도모한 이와 같은 외래 복식의 전략적 수용은 한국 복식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다. 신라가 동아시아 통일 제국을 이루고 있던 당(唐)의 의례와 관복제도를 도입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우월한 문화를 가진 선진국가임을 표방하고자 한 것이자, 외교적으로 당과 연합하고 있으며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와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패했고,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를 아우르는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루어 천년의 역사를 남기는 왕조가 되었다.

 

그 당시 채택된 단령과 복두는 고려왕조를 지나 근세의 조선이 1897년 대한제국을 거쳐 1910년 한일병합으로 사라질 때까지 신분사회 상층부를 이루는 최고 통치권자와 관료들의 높은 지위를 상징하는 복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현대사회에서조차 결혼식에서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폐백 의식에 착용하는 신랑의 사모관대나 아이들의 돌잔치 복식으로도 사랑받는 전통 복식 일습(一襲:세트)을 이루고 있다.

 

왕의 복식, 그 옷에 숨겨진 의미와 가치

서울 시내 인사동에서 가까운 경복궁 근처에 최근 가장 번성하고 있는 업종이 ‘한복대여점’이다. 원래 인사동을 찾은 국내 관광객들이 전통한복을 입고 추억에 남을 만한 사진을 촬영하도록 한복집이 스튜디오를 마련해 한복을 대여하면서 시작된 한복대여점은 최근 서울은 물론이고 한옥이 밀집된 역사 도시를 방문하는 국내외 여행객들에게 ‘필수 코스'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코스튬플레이 붐을 일으킨 원조 매장 격에 해당하는 곳에서 십수 년간 근무해 온 점장의 보고에 의하면 한복대여점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남자 한복이‘왕의 옷’이라고 한다. 특히 조선시대 왕이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던 곤룡포 일습은 착용해야 하는 관모인 익선관(翼善冠)이 사모(紗帽)와 같은 것이라 착용이 편리하고, 행동에 번거롭지 않으며, 드라마에서도 자주 접하는 친근한 옷이기에 더욱 선호된다고 말한다.

 

신분제가 있었던 시대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평등 사회에서나 ‘최고위 통치자’의 복식은 비록다르긴 하지만 주목받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복식의 위상에 부합하는 권한과 역량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행위와 책임을 담보하는 상징물로서 복식은 계속 작용하고 있다. 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어렵고 고된 곳인지도 모르고 참 쉽게도‘왕의 옷’을 빌려 입는 오늘날의 우리네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글. 지수현 (원광디지털대 한국복식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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