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3 추억의 완행열차

특집 3 추억의 완행열차

 

영산강 물길 따라 내달린 추억 열차여행, 공짜 기차 안타본 사람 여길 보시오

 

통학열차에는 이처럼 지난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우리들의 갈망과 열망의 기억이 온전히 담겨있다.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영산강을 끼고 형성된 호남선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추억의 대명사로 운위되는 통학열차에는 당시대는 물론 오늘에서 내일까지 이어지는 열망과 갈망이 어우러져 묻어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혼돈과 폐허에서 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어떻게든 도시로 나가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고자 했던 기억이 어울려 있다.  지난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영산강을 끼고 달리는 호남선에도 응당 통학열차가 있었다. 거의 유일한 교통로였던 호남선으로 연결된 광주와 목포사이에 있던 시골의 각 역에서 수많은 통학생들이 청운의 품을 안고 기차통학을 했다. 필자는 지난 수년 동안 이의 현장인 몽탄역, 일로역, 임성리역, 무안역 등에서 이와 관련된 철로 연변의 마을사 및 생애사 등을 채록하고 수집하였다.  이를 통해 갈수록 공동화 되어가는 철로 연변 시골마을의 재생과 복원을 위한 각종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을 일깨워 흥미로운 감성으로 이끌어주는 원천소스의 하나가 통학열차였다.

어제에서 내일을 일구던 열망의 열차

버스와 승용차를 비롯한 편리한 교통수단이 많은 현재와 달리 기차는 서민들의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광주역에서 목포역까지 이어지는 남도의 호남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00년의 역사를 넘어가는 호남선은 원래는 일반 민중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반도의 각종 물자 수탈과 함께 대륙 침략의 운송로로 삼으려는 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대부분의 철도가 그렇듯이 호남선역시 물자 수송 위주의 철도로 건설되어 운용되었다.  대동아 전쟁후반기에는 여객 수송 보다는 화물 운송에 전념하고자 목포역명을 아예 목포부두역으로 바꾸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1945년 해방이후 다시 몰아쳐온 6·25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 후반에 이르러서야 호남선은 온전히 일반 민중들의 교통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엄혹한 식민지에서의 해방과 전쟁을 피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시골의 각 지역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과 기회를 확장하기 위한 용트림이 펼쳐졌다.  그 용트림의 구체적인 동력이 흔히 말하는 면서기 하나라도 만들어야 가문이 산다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를 위해 각 지역의 구간구간마다 인근 도시로 이어지는 통학열차들이 새벽마다 더운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통학열차에는 이처럼 지난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우리들의 갈망과 열망의 기억이 온전히 담겨있다.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을 끼고 형성된 호남선 역시 마찬가지다.  대략 광주역에서 목포역까지 이어진 철도망을 따라 현재의 함평역인 학다리로 불리던 학교역까지는 광주로 통학하였고, 그 아래 구간인 현재의 무안역인 사창역과 몽탄역, 명산역, 일로역 등은 목포로 통학하였다.  이러한 통학열차는 일제 강점기에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이 되었던 것처럼 역사에 직접 노출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개개인의 내면사로 묻혀있다.

 

추억으로 가는 통학열차

1970년대 중반에 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타기 때문에 학생차라 불린 통학열차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침 6시 30분과 7시에 걸쳐 두 대가 운행되었다.  기차비 역시 몽탄역에서 목포역까지 약 100원 정도로 아주 싼 가격이었다.  보통 한달 기간의 정기승차권 곧 통학권을 사용했지만 아이들은 공짜기차를 타는 경우도 많았다.  기차를 공짜로 타고 아낀 돈으로 과자나 빵을 사먹었다. 따라서 기차에서 차장들이 검표를 심하게 했다.  여기에서 걸린 아이들의 귀때기를 검표가위로 끌고 가서 혼내곤 했다.  그래서 검표가 시작되면 재미로 즐기던 '기차 노리까이 실력을 발휘해서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일명 '기차 노리까이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오르거나 뛰어내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도리까이는 기차 발통 굴러가는 소리와 덜컹대는 기차의 연결기 소리 등을 잘 계산해서 이에 맞는 몸의 각도 등을 잘 맞추어야 하는 험한 일이었다.  또한 기차에서 뛰어내렸다가 당시 '고꾼으로 불린 선로반 직원들에게 걸리면 거의 한나절은 일을 해야 했다.  당시 고꾼들은 나무 침목을 통째로 매고 다닐 정도로 근력이 센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서워했다. 몽탄 구간에서는 주로 몽탄역에서 기차가 출발한 후에 차표 조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공짜 기차를 타던 아이가 하필 몽탄의 첫 철도터널 앞에서 뛰어내리다가 굴의 입구에 부딪쳐서 죽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통학열차 최초의 집단항의 사건

당시 일로역에서 동목포역으로 통학했던 전 목포문화방송 나영진 프로듀서로부터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철도를 상대로 최초의 단체행동을 했다고 한다.  당시 통학기차는 보통 1시간 정도씩은 매번 연착을 했다. 고막원역에서부터 통학생이 타기 시작하면 기차가 금세 만원이 되어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동학기차가 일상적으로 연착하다보니 학교에서는 통학생들의 지각을 그냥 인정했다. 하지만 일부 선생님들은 기차통학생들을 문제아 취급했다.

그래서 어느 날 연착된 통학열차를 타고 오던 그가 나서서 동목포역에서 내리지 말고 목포역까지 가자고 설득했다.  당시 동목포역은 문태고, 목포상고, 마리아회고, 목포고, 목포공고 등의 통학생이 있었고, 목포역에서 내리는 통학생은 정명여고, 동광고, 목포여고, 덕인고, 혜인여고 등이었다.  통학기차의 앞 칸에서 맨 뒤의 여학생 칸까지 가서 설득하자 모두 동의했다.  그래서 목포역 안의 플랫홈에서 그들은 집단으로 모여앉아 철도직원들에게 정식으로 연착에 대한 항의를 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주동자였던 그는 목포경찰서 정보과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웅변을 잘했던 그는 광주학생의거를 아느냐는 등의 달변으로 해서, 앞으로는 이러한 단체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간신히 풀려나왔다고 한다.

01. 1970년대 동목포역  /  02. 03 1981년 사창역

 

통학열차를 주름잡던 청춘의 주먹들

통학열차하면 무엇보다도 삐까번쩍' 하게 다려 입은 교련복에 '하얀 에리'를 세운 교복을 입고 몰려다니던 젊은 청춘의 복색이 떠오른다.  여기에 은밀히 쉬쉬하면서 공개리에 퍼져가던 연애 사건과 함께 통학열차와 역전거리 등에서 의리의 주먹을 날리던 소위 '학생 깡패'들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당시 통학생들은 통학기차를 중심으로 지역 간 세력 다툼을 했다.  목포역으로 통학하는 통학생들은 크게 몽탄권과 일로권으로 구분되었다.  소위 몽탄파는 사창, 몽탄, 명산이 뭉쳐 있었고 일로파는 일로와 삼향 일부가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 지는 주로 몽탄파에서 통학열차 내 주도권을 잡았다. 당시 몽탄면은 인구가 14,000명이 넘을 정도로 지역세가 컸다.  앞으로 영산강을 끼고 뒤로 험한 승달산 줄기를 둔 배산임수형의 지세로 상하좌우가 갈래갈래 막혀있던 몽탄 지역에 철도가 놓여 이를 관통하면서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호남선 건설 당시 지역유지들이 많이 살던 무안읍내를 경유하는 대신 몽탄으로 철도가 놓이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래서 몽탄에는 사창역, 몽탄역, 명산역 등 철도역 3개, 철도터널 3개, 경찰지서 3개(몽탄, 사창, 명산지서)가 있다는 말로 활성화된 지역의 위세를 자랑하곤 하였다.  또한 이뿐만이 아니라 나주 동강의 학생들도 나룻배로 영산강을 건너 명산역을 통해 통학을 하면서 자연히 몽탄권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세력이 컸다.  아침에 영산강을 중심으로 통학기차를 타려는 학생들이 나룻배 2대를 타고 몰려들면 수가 너무 많아서 나루터에서 명산역까지 줄을 지어서 기다리다가 기차를 탔다.  그리고 학생들이 다 탈 때까지 기차가 기다려주었다.  학생들이 아무리 많아도 당시는 통학기차 자체가 좌석이 거의 없이 서서가는 '하꼬차'였기 때문에 쟁여서 탈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 후반에 이르면서 우시장이 있던 일로장을 중심으로 일로읍이 발전한데다 청소년 보호시설이 들어오면서 통학열차내의 판세가 바뀌었다.  특히 일로에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는 일로장터 주변의 거친 시장 바람에 더하여 늘어난 열차 통학생들 자체가 많아졌다.  또한, 칭소년 보호시설의 아이들은 한 명이 붙으면 모두가 같이 달라붙어서 싸우므로 함부로 맞설 수가 없었다.  당시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이들을 기통이라고 불렀다.  기통을 다들 무서워했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100원씩만 주라고 해서 당시 300원 정도였던 담뱃값이 될 때까지 삥땅을 뜯곤 했다.  단순히 째려본다고 행패를 부려서 살상사고가 나기도 했다.  이에 몽탄의 아이들은 광주나 무안읍내의 학교로 옮겨서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몽탄의 일부 이장들이 나서서 60여명에 이르는 몽탄의 통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무안군수에게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열차 내에서의 일이라 나서기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후배 살리기 운동 차원으로 몽탄 출신 판검사들을 찾아서 호소한 결과 경찰 2명이 2년 간 통학열차에 동승하였다.  그리하여 몽탄지서장은 매일 아침 7시면 무안 경찰서장에게 상황을 보고 해야 하는 등 애로사항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출처 : 대동문화 / 글 박곤서 시인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