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유래

설날의 유래

기획특집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 《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해서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설날의 유래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원단, 세수, 정초, 라고도 부른다.  원래 설이라는 말은 "사린다, 사간다" 에서 온 말로 조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 '섧다' 에서 온 것으로 보아서는 '슬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설이란 그저 기쁜 날이라기보다는 한해가 시작되는 뜻에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딛는 매우 뜻 깊은 명절로 현재까지 이어져왔다. 그래서 설날을 <삼가는 날>이라고 해서 이날에는 바깥출입을 삼가하고 집안에서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주기를 신에게 빌어왔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새해 아침에 입는 새 옷인 '설빔"을 입고 돌아가신 조상들께 절을 드리는 차례를 지내고 그런 다음 나이가 많은 어른들부터 새해인사 "세배"를 한다.  세배를 할 때에는 새해 첫 날을 맞아서 서로의 행복을 빌고 축복해주는 "덕담"을 주고받는다.  이렇듯 새해 첫날은 하루 종일 복을 빌고 좋은 말을 많이 해왔다. 설날의 유래 첫째로는 '서럽다'는 `설'이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이란 문헌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달'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이요, '도'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茶禮)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음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 설(說)이다.  각종 세시기(歲時記)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까닭이다.

 

옛날 문헌들에 정초에 처음 드는 용(辰)띠날, 말(牛)띠날, 쥐(子)띠날, 돼지(亥)띠날,그리고 2월 초하룻날을 신일(愼日)로 적혀 있음을 근거로 하여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풀이한 기원설이다.

 

새해부터 처음 맞이하는 십이일을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이라 하여 여러 가지를 삼가며 조심할 것을 가르친 풍속이 있는 걸 볼 때 매우 타당한 설(說)이다.

 

 

설날이면 가족이 모여 떡국을 먹으며 소원을 빌고 덕담을 나누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다.  지금도 설날이면 으레 떡국을 끓이지만 예전에는 설날에 떡국을 먹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설은 가까이 다가오는데 어린 것에게 떡국 한 그릇 먹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에게 떡국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 전당포 문이 닫히기 전에 떡 사고 간장 사서 설날 아침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빨아서 다듬어놓은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 전이라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전당포 주인이 “치마를 어디에 쓰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치마를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의 신문 기사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인정이 살아 있음에 놀라고, 설날이라고 기를 쓰며 떡국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애쓰는 모정에 감동한다.

 

설날에는 왜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 할까? 육당 최남선은 떡국이 먼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복을 빌며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월 초하루인 설날은 태양이 부활하는 날로 천지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다.  양의 기운이 돋아나 만물이 되살아나는 날, 질병을 예방하고 장수를 빌며 한 해 동안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먹던 음식이 바로 떡국이라는 것이다.

 

너무 추상적이라서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떡국에 도대체 어떤 소원을 담았을까?  떡국 재료인 가래떡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래떡은 다른 떡과 달리 끊어지지 않게 길게 늘여 만든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설날이면 멥쌀가루를 쪄서 커다란 목판 위에다 놓고 떡메로 무수히 내리쳐 길게 늘여서 만든다”고 했는데 굳이 힘들게 무수히 내리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떡을 길게 만든 것은 가래떡에 장수와 재복의 소원을 담았기 때문이다. 국수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떡국에는 부자 되게 해달라는 소망도 담겨 있다. 가래떡은 굵고 길다. 그래서 떡국을 끓이려면 떡을 썰어야 하는데, 흥미롭게도 옛 문헌에서는 하나같이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썬다고 표현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동전처럼 얇고 가늘게 썰어 소고기나 꿩고기를 넣은 후 후춧가루로 양념을 한 후에 먹는데 이를 떡국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동국세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한양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서도 섣달 그믐날이면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가늘게 썬 후 설날 떡국을 끓여서 식구 숫자대로 한 그릇씩 먹는다고 했다.

물론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에서 떡을 동전 모양으로 썬다고 표현한 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새해 첫날 먹는 음식은 대부분 돈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우리도 중부 이북에서는 설날에 떡국과 함께 만두를 먹는데 중국도 춘절에는 만두를 먹는다.  그런데 춘절에 먹는 만두는 평소의 교자만두, 혹은 포자만두와는 생김새가 다르다.  우리처럼 만두 양끝을 둥글게 말아서 붙인다.  원보(元寶)라는 옛날 중국 은자를 본떠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 모양으로 빚은 만두를 먹으며 집안에 재물이 넘치기를 비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 부잣집에서는 금, 은을 넣고 만두를 빚는데 금과 은이 들어간 만두를 먹은 사람은 일 년 동안 운수 대통한다고 믿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숙종 때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이 《해유록》에 일본 떡도 우리의 권무병(拳拇餠)과 닮았다고 적었다.  권무병은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떡이라는 뜻으로 가래떡을 권무병이라고 했으니 엽전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 사람들 역시 새해 떡국을 먹으며 부자 되기를 소원한 것이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도 비슷한 풍속이 있다.  프랑스와 그리스 등 일부 유럽 국가에도 새해에 동전을 숨긴 케이크를 나누어 먹는 전통이 있다.  케이크를 먹다가 동전을 씹는 사람은 한 해 동안 운수가 대통한다고 믿었으니 동서양의 풍속이 닮은 꼴이다.

 

떡국에는 이렇게 가래떡처럼 길게 오래 살게 해달라는 장수의 소망과 부자 되게 해달라는 소원이 담겨 있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으니 떡국 먹으며 한 해 건강과 이재의 꿈을 다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출처 :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 저자 윤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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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