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목포의 설움

 

가수 이난영이 1935년 발표한 노래 ‘목포의 눈물’은 우리 민족의 한과 설움을 진하게 담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됐으며 현재까지도 해군의 전략적 요지로 쓰이고 있다.  바로 이 요긴한 바닷길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가 된 것이다.  목포는 1897년 대한제국 당시 고종의 칙령반포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자주 개항’한 도시다.  동시에 호남의 풍부한 곡물과 자원을 일제로 옮기는 역할을 맡게 됐다.  당시 목포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영산강 수로를 통해 나주, 광주 등 내륙까지도 화물운반이 가능해 수륙을 연결하는 거점이었다. 목포의 지리적 이점이 일제에 의해 악용되면서, 이난영의 목포의 설움처럼 눈물을 흘리는 서러운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은 1900년에 일본 영사관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다. 위치도 아주 좋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해 목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건물 평면은 장방형으로 중앙 바깥쪽으로 현관이 나 있고,  내부의 바닥은 나무로 만들어져 걸으면 따박 따박 발자국소리가 좋다.  사면은 모두 지붕면이 있고 용마루와 추녀마루로 구성된 우진각지붕으로 건물의 뚜껑을 완성했다.  1층과 2층 사이에 벽돌의 허리 돌림띠를 두었으며 창문 왼쪽과 오른쪽은 흰색 벽돌로 장식했다.

 

 

 

 

 

건물 내부의 소품들까지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흔적과 함께 근대 건축물로서 역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1981년 국가사적 제289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멋지고 견고하게 지은 르네상스 건축물은 겉보기에 꽤나 낭만적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낭만 속에 가려진 목포의 설움들이 보인다.

 

 

 

 

 

 

 

목포근대역사관의 여러 이름들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은 일제의 정치적 본거지이자 치열한 항쟁의 증인이었다.  1900년 1월, 당시 목포 일본 영사관으로 불리던 이 건물을 착공했고 같은 해 12월 완공됐다.  일본은 영사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정부로부터 해안을 수비하기 위한 관청인 ‘만호청’을 빌려 사용했다.  그러다 유달산 고지대에 가건물을 지어 이관했으며,  다시 현재의 위치인 대의동에 목포일본 영사관과 부대시설인 경찰서, 우편국 등을 함께 지었다.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됐지만 한일 간의 국제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914년부터 목포 이사청, 1974년부터 (구)목포 일본 영사관, 1990년 1월부터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최근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를 거친 후인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그리고 현재 목포근대역사관 본관으로 불린다. 수많은 이름을 거쳐가는 동안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역사가 됐다.

 

 

목포근대역사관 본관 계단을  도로변에 커다란 돌에 ‘국도1·2호선기점’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돌이 있는 삼거리가 한국 도로 역사의 기념비적인 장소다.  국도 1호선은 목포에서 광주, 전주, 익산, 공주, 수원, 서울을 지나 개성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939km 도로를 일컫는다.  더 멀게 본다면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뻗어갈 수 있는 유라시아 횡단로의 시작점이다.  국도 2호선은 목포에서 강진, 순천, 진주 등을 거쳐 부산까지 한반도 남쪽을 횡단하는 도로다. 그야말로 세계를 관통하는 교차점이자, 관문인 셈이다.  일제는 영사관을 짓고 난 뒤 목포역과 함께 이처럼 사방에 도로를 건설하고, 인근에 행정기관을 설치해 완벽한 통제를 꿈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대가 바로 목표 근대사에 있어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