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견보탑품의 이불병좌상 二佛竝坐像

이불병좌상 二佛竝坐像

 

이불병좌상이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견보답품(見寶塔品)」의 내용 중 석가불(釋迦佛)이 다보불(多寶佛)과 다보탑(多寶塔)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도상화한 불상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보면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취상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계실 때 다보부처님의 불탑이 솟아나와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고 찬탄하고 석가모니부처님이 보탑에 들어가 나란히 앉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 장면을 잘 나타낸 그림이 바로 통도사 영산전의 이 변상도이다.

통도사 영산전 서쪽 내부의 전면벽을 차지하고 있는 이 벽화는 『법화경』 「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로서 국내에서는 유일한 벽화로 남아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 희귀성과 중요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연구와 보전을 위해 각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벽화는 말 그대로 「견보탑품」에 나오는 다보탑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1716년에서 1800년 사이에 당시 활동하던 화승 지연(指演) 문하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며,  조선 후기 불화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대한 보탑 안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분반좌(分半座)하여 앉아 있는 이불병좌(二佛竝座)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탑 전체에는 온갖 영락과 보배로 된 풍경이 장엄되어 있고, 그 주변과 탑 위에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을 장식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탑 좌우로 보살과 제자들이 대칭구조를 이루며 천상에서 하강하듯 내영(來迎)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극한 신심을 일으키게 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이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발해의 팔련성 (지린성 혼춘시의 팔련성八連城) 제2사지에서 출토

  된  이불병좌상은 바로 이 장면을 불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높이 29㎝.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

  는 발해 이불병좌상 중에서 그 형태가 가장 완전한 상이다.  응회암

  제(凝灰岩製)의 환조(丸彫 :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 전부

  를 조각해 내는 일)로 부드러운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석가와 다보 

  두 여래상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

  像)"으로, 광배에는 연꽃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동자상(童子像) 5

  구를 돋을새김 하였는데, 연화화생상(蓮花化生像)은 이 세상에서 좋

  은 일을 하면 극락 간다는 아미타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중국에도 이러한 종류의 이불병좌상이 남아 있다.

   북위시대인 518년에 만들어진 금동이불병좌상이다. 

 

 

 

 

 

 

 

 

 

 

보협인석탑(국보 209호), 특이한 형태의 고려시대 석탑

 

이 탑의 아래층을 보면은 부처님 두분이 나란히 앉아있다. 동국대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으며 보협인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의 석탑으로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일반적인 탑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과 탑신을 구별하기 힘들며, 5개의 돌만 남아 있는 것을 조립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복원한 것은 아니다.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에 불상 또는 석가모니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천안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동국대박물관으로 옮겼다. 보협인석탑은 중국 오대10국 중 오월(吳越)의 마지막왕 전홍숙인 인도 아소카왕의 전례를 따라 소탑 8만4천기를 만들고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다고 해서 유래한 것이다.  10세기 중반경에 조성되었으며, 조성 당시 한국과 일본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경우 다수의 예가 남아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동국대박물관에 있는 이탑이 유일하다.

 

                                                             괴산 원풍리 이불마애병좌상

보물 제97호. 높이 3m. 높이 12m의 암벽에 세로 363㎝, 가로 363㎝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병좌한 불상 2구와 화불 등을 조각한 것이다. 고려시대 작품이면서도 옛 형식을 보이고 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불상은 중국의 북위시대, 특히 5, 6세기에 크게 유행했던 형식으로 〈법화경〉의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를 표현한 것인데 이것이 그에 해당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대전사 출토 금동이불병좌상(傳大典寺出土金銅二佛幷坐像)과 벽화인 통도사 영산전 견보탑품변상(見寶塔品變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두 불상은 옷주름이 대칭으로 표현되는 등 동일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이불병좌상(二佛井坐像)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넓적하며 평면적인 불상의 얼굴에는 가는 눈, 뭉툭한 코, 꽉 다문 입 등이 묘사되어 있어, 건장한 인상을 준다.  직사각형의 신체는 넓은 어깨와 굵은 팔로 인해 매우 강건해 보이면서도 가슴이 들어가서 움츠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포개놓았는데, 그 위로 옷자락이 덮여 흘러내렸다.  배 부근까지 깊게 파인 U자형의 통견의(通肩衣)는 굵은 선각으로 평행하게 처리되었으며,  가슴에는 옷깃 모양(y형 또는 Y형)의 승각기(脚)가 표현되었다.  복부 아랫부분은 마멸이 심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불상 좌우의 좁은 여백에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보살상 같은 것이 새겨져 있고,  머리 주위에는 각 5구씩의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다.  또한 불상의 군데군데에는 채색을 가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간절한 염원을 안은 기도 객이든 수도자든 상관없다.  부처님은 누구라도 따스한 염화미소로 맞아주실 것이다.  경외감에 엎드려 절을 올려도 좋고,  무심한 세월에 상처 입은 돌을 가만히 어루만져 봐도 좋으리라.  그래서 천 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동아줄 하나에 목숨 매달고 그 숱한 시간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댔을 석공의 땀방울과 숨소리라도 느껴보면 어떨까?  어쩌면 저 하염없는 세월 동안 그대를 기다려왔을 부처님의 마음이 전해질 지도 모를 일이다』

.-유통 후의 마애를 찾아가는 여행책 중에서-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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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