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몸을 팔러나가는 일본 여성들-카라유키상(唐行きさん

[해외로 몸을 팔러나가는 일본 여성들-카라유키상(唐行きさん)]

 

카라유키상으로 해외로 나간 일본인 여성의 대부분은 농촌, 어촌 등의 가난한 가정의 딸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을 해외 창관으로 중개 한 것은 포주등으로 불리는 알선업자, 뚜쟁이들입니다. 뚜쟁이 기록으로 나가사키 출신의 무라오카(伊平治)의 자서전이 있는데, 그 자서전에는 뚜쟁이들은 가난한 농촌 등을 돌며 적령기 여성을 찾아 해외로 보내자고 부모를 설득하고 현금을 건넵니다. (부모를 설득하는 과정을 일본어 표기로 奉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봉공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의미인 것인지? 아니면, 해외로 몸을 팔러가는 것이 가족이나 사회를 위하는 행위라고 설득을 했다는 것인지? 카라유키상을 소개하는 책에는 여성들을 속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확실히 한국의 종군위안부의 경우와 오버랩이 되지요?)

 

 

뚜쟁이들은 그녀들을 매춘 업자에게 전달하여 품삯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품삯을 모으거나 투자를 받거나함으로써 스스로 해외 창관(매춘집을 이야기하는 듯)의 경영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이런 일본인 여성의 해외 여행은 당초 여론에서도 <낭자군(娘子軍)>으로 선전되는데, 메이지 말기에 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낭자군이란 일본이 해외로 진출하는 방법의 하나로 여겨졌던 듯 합니다. 그녀들의 수입을 해외에서의 자본의 획득으로 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즉, 해외 노동력 수출과 같은 개념으로 취급받은 것 같습니다.)

 

(카라유키상 이국에 팔려간 소녀들-아사히문고)

 

그러나, 국제적으로 인신 매매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일본 국내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국가의 수치"로 비난받기 시작합니다. 영국령 말라야의 일본 영사관은 1920년에 일본인 창녀의 추방을 선언하고, 결국 해외에서 일본인 창관은 모습을 감추어 갑니다. 많은 카라유키상은 일본으로 돌아 갔지만, 갱생 과정없이 잔류한 사람도 있습니다. 카라유키상의 주요 목적지는 싱가포르, 중국, 홍콩, 필리핀, 보르네오,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각지입니다. 특히 당시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배하던 서양 군대의 강한 요청이 있던 곳으로 많은 파견되었습니다. 또한 더 멀리 시베리아, 만주, 하와이, 북미(캘리포니아 등), 아프리카(잔지바르 등)에 건너간 일본인 여성의 예도 있습니다.

 

 

■ 카라유키상 노동 조건은 어떠했을 까요? 다이쇼 중기부터 쇼와 전기의 보르네오의 예를 보면수입에서의 창녀의 몫은 50%입니다. 그 중에서 부채 상환 분이 25 %,나머지에서 기모노 의상 등의 잡비를 내야 했는데, 그 정도의 수입을 내기 위하여는 월 20명의 손님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중에는 부지런히 일하여, 매월 수백 엔 정도 씩 갚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검사 비용을 합하면 월 130명에 해당하는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핀 정부의 보건 검사의 경우 주 1회 임질 검사, 월 1회 매독 검사를 합치면, 잡비의 두 배가 창녀의 부담이 되었다). 평소 손님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항구에 배가 들어 왔을 경우에는 어느 창관이나 만원으로 가장 심할 때는 하룻밤에 30명의 손님을 상대합니다. 비용은 숙박 10엔, 숙박없이 2엔.고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5분으로 더 걸리는 경우는 할증 요금 규정했습니다. 그녀들에게는 당연히 휴가나 휴일은 없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보급시킨 공창(매춘)제도]

미국의 유명한 일간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1919년 12월 26일자 기사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해낸 일은 유곽의 증설이다. 이것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인 남녀를 타락시키고자 한 것이다."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 사설의 지적처럼 일본 군대와 낭인과 함께 가장 먼저 조선에 자리잡고 활동한 것에는 창기와 유곽이 있었다. 창기(娼妓)란 우리의 전통적인 기생과는 달리 매춘사업을 전업으로 하는 娼女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생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매춘과는 전혀 다르고, 매춘 행위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일제(日帝)는 1904년 10월 서울 쌍림동에 제일루라는 유곽을 만들었으며 병합과 함께 공창제도를 만들고 초기에는 일본 여성으로만 구성하다가 차츰 조선 여성들로 대체하였다. 공창제도가 시작되면서 娼女村과 유곽이 날로 번성하여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충무로 인근 쌍림동과 용산구 도원동, 마포구 일대, 다동, 도림동, 아주개, 종로, 소공동, 구리개, 황토현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娼女村과 유곽이 늘어나면서 각종 성병이 만연하고 국민의 윤리도덕이 날로 퇴폐하였으며, 청장년들의 유곽 출입으로 가정파탄이 끊이지 않았다. 몇개의 창기조합이 결성되어 관헌의 보호를 받는 기이한 현상도 있었다. 총독부는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 부령 제4호를 발표하여 공창제도를 합법화 시키면서 이를 적극 보호하였다. 총독부가 창기조합까지 결성시키면서 이것을 '보호 육성'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파괴함으로써 일본에 동화시키며, 망국지한(亡國之恨)의 울화에 견디지 못하는 우국지사들을 청루로 끌어 들이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청년자제들을 주색에 빠뜨리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정과 유곽, 매음굴이 수천군데가 생기고, 땅을 빼앗긴 조선인 처녀들은 생계 수단으로 유곽으로 모여들어 대도시는 물론 지방 도시에까지 娼女村이 번창해 갔다.조선총독부의 이와 같은 추잡한 '인육시장' 보호정책은 다른 어떠한 억압이나 고문, 재산상의 수탈에 못지 않은 잔학하고 악독한 행위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 지구호 선생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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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