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태극기에는 민족의 얼이 담겨 있었다.

진관사태극기에는 민족의 얼이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의 흔적 진관사의 태극기

[진관사태극기 : 크기는 가로 89cm × 세로 70cm 재질은 면직물]

국경일마다 은평구거리 가로등 국기게양대에는 요즘 우리가 접하는 태극기와 모양이 다른 태극기가 게양된다. 이 모양의 다른 태극기는 낡고 헤진 모양의 태극기를 인쇄하여 함께 게양한다.


 최근 이 낡고 어색한 모양의 태극기가 우리 민족의 얼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태극기는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에서 발견 된 태극기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태극기였던 것이다.

 진관사는 조계종의 말사로 고려시대 창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근교 4대사찰의 중심 사찰 역할을 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BXhY072uA

 진관사의 건축물들은 한국전쟁당시 폭격으로 대부분이 거의 소실 되었으나 칠성각은  그나마 피해가 덜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칠성각은 한국불교가 우리에 정착할때 토속신앙과 민속문화에 조화롭게 흡수되 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를 보여주던 곳이기도 하다.

 칠성각이 노후화로 인하여  2009년 보수공사 중 목수에  의해 법당과 기둥사이에서 낡은 보자기와 신문뭉치가 발견되었다.


이 때발견 된 보자기는 1919년 제작된 헤어진 태극기였고 신문뭉치의 신문들은 1919년6월12일사이 발행 된  '독립신문', '신대한','조선독립신문','경고문''자유신종보'로 6종 20점의 중요한 자료였것 것이다.
 
http://naver.me/GBq730zj


자유신종보는 기존에 이름만 전해질 뿐 실존하지 않았던 신문으로 불교계 독립신문으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자료로 이다. 더불어 신문들에는  3·1운동 이후의 상황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태극기 관련 기사 및 자료들이 실려 있었다.
이때 발견된 독립신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으로 제30호와 제32호가 각 2점씩 발견되었다.
제30호에는 [태극기]라는 시(詩)가 실려있고 제32호에는 태극의 의미와 태극기 그리는 법 등을 설명한 글이 실려 있다.

  [신대한]은 단재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창간한 신문인으로  제1~3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는 데 신대한은 말로만 전해오던 신문이 실제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제2호에는 개천절에 강화도 모처에서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나 일본군에게 압수당하고 수모를 겪은 내용이 실려 있다.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 직후부터 국내에서 발행한 지하신문으로 제32호, 제40~42호, 호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다. 이 신문 제호란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진관사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이 제정한 태극기의 모양과 정확히 일치하는 태극기로 의정원의 태극기를 보고 그렸다고 보는 견해가 크다.

 더우기 새 천에 만든 것이 아니라 일장기 위에 태극과 괘를 덧그렸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아마도 천이 없어서 라기보다는 '일본의 기운을 이 국기의 태극으로 누르고 대한독립을 이루겠다.'는 굳은 각오가 서려있는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이런 중요한 자료가 90년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귀중한 자료가 이 곳에 있게 된 경위를 찾아보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에 힘쓴 승려들 중에는 ‘만해 한용운’, ‘백용성’, ‘이정옥, '백초월스님’ 등 여러 분들이 계신데 이 분들 중에  진관사와 인연이 깊은 스님이 백초월(1878~1944)스님이시다.

[백초월스님 사진은 옥사에서 사진이 전부였습니다.]

백초월 스님께서는 명진학교교장으로계시면서 청년들을 교육하여 만주로 독립군으로 보내셨다.  항일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인쇄물을 간행한 한국민단부(韓國民團部)의 부장을 맡아 활동하셨다.
 항일신문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 사장으로 활약하며 신문을 상해임시정부 및 길림성(吉林省)의 독립군에 보냈다.

[은평구청에서는 해마다 3.1절이되면 구청건물에
진관사태극기를 게양한다.]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신상완(申尙玩)이 주도하여 조직한 승려결사인 의용승군(義勇僧軍)에도 관계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셨다.

1919년 12월, 1920년 3월, 5월 서너 차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셨고
1940년 해방을 1년 여 앞둔 1944년 6월 29일, 옥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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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