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참전국일 뻔한 태국



올해는 동남아시아의 국가인 태국과의 수교 61년이 됩니다.

태국은 1949년 10월에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하였고, 1950년 11월에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총 참전 1만 5,708명이었고, 이 가운데 사망 136명, 부상 469명이었습니다.

1957년 태국은 한국에 주둔중이던 태국군의 즉시 철군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태국군은 1972년까지 1개 중대의 전투병을 계속 한국에 주둔시켜 미군이외 최장기간 한국에 파병한 국가가 됩니다.
                                                                      (철군하는 태국군)


1958년 10월에는 한국의 9번째 수교국이 되어 외교관계를 수립합니다.


그런데, 태국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참전을 할 뻔 했습니다.
태국은 조선시대에는 섬라(暹羅)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에서의 첫 기록은 태조 2년 섬라국에서 사신 20명이 방문하여,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받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는 섬라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는데, 중간에서 왜구로 인하여 교류가 원활하지는 못하였던 듯 합니다.

이후에도 태종, 세조, 중종실록등에 섬라국에 대한 기사가 간간히 등장을 하지만, 조선과의 직접 교류아닌 중국에서의 섬라국 사신의 활동등에 대한 보고정도입니다.

그런데, 섬라국(태국)은 선조실록에 다시 등장합니다.

황윤길등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후, 일본의 음모가 명나라에도 알려지자, 명나라는 섬라국, 유구국, 조선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을 직접 정벌하도록하는 기록(선조25년6월26일)이 나옵니다. 물론 이때는 아직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이후 왜란이 터지고, 평양까지 왜군이 진격한 상황에서 명나라황제는 칙서를 내립니다. “유구/섬라에 칙서를 내려 군사 수십만을 모집, 함께 일본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적의 수괴를 척살하는등 일본 정벌을 하겠다”는 내용입니다.(선조25년9월2일)

같은해 12월(선조25년12월8일) "섬라의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여 조선을 구원하기를 청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 그 청을 허락하였으므로 내년 봄에 군사를 내어 일본을 정벌한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조26년1월23일에는 명나라장수 황용양이 선조에게 “제가 남방에서 군사를 조발하였기 때문에 대군(大軍)과 함께 올 수 없었습니다. 섬라국에서는 이미 일본을 정벌할 10만의 군사를 징발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명/섬라/유구등 4개국의 연합군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으로의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조선에 들어와있는 왜병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섬라국, 유구국과 연합하여 일본을 직접 공격하는 방안에 대하여 그리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또한 명나라 내부, 광동성총독과 광서성총독은 군사강국이었던 섬라가 일본을 점령한 뒤에 명나라로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며 강력히 반대를 합니다.

그로인하여, 태국의 공식적인 임진왜란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조26년 4월 10일 기사는 병조판서 이항복이 명나라 부총병 유정을 만나는데, “유정은 신 등에게 각종 무기를 꺼내어 보여준데 이어, 섬라(태국), 도만(都灣), 소서천축(小西天竺-인도), 육번득능국묘자(六番得楞國苗子), 서번삼색(西番三塞, 티벳), 면국(緬國, 미얀마), 파주(播州), 당파(鎲鈀) 사람들을 좌우로 정렬하게 한 뒤 각각 자신의 묘기를 자랑하도록 해 종일 구경하였습니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명나라군에 속해 참전한 태국인들은 있었던 듯 합니다.
자료출처 : 이경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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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