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에 보는 안중근가문 40여명의 독립운동.

무려 40여명이 독립운동을 펼친 위대한 안중근 가문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무인이자 한반도의 대영웅이며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총알 3방에 아시아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뀌었다.
 
                                                      ▲ 안중근의사가 의거(義擧)를 위해
                                                     준비한 권총 3정과 실탄(실제 기록사진)

 
이처럼 위대한 안중근 곁에는 그의 불타는 애국심을 함께한 훌륭한 분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우리는 잘 알지 못했던 도마 (세례명)안중근의 뜨거운 애국심의 원천이자 꿋꿋한 독립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사를 알아본다.
 

독립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져있는 정보로 최대한 알아본다.
 
아래 글의 출처는 위키백과 및 구글의 글을 편집한 것이다.
 
                                                              조마리아 (본명: 조성녀)
 
그녀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다음은 아들의 사형선고를 듣고 조여사께서 아들인 안중근 의사에게 쓴 편지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을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안정근 <사진출처 - 한국학 중앙연구원>
 
그는 안중근의 첫째동생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상하이에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9년에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이 되었다. 더불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도 활동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 선전과 군자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공근
 
안중근의 둘째동생으로 독립운동가다.  안중근 의거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상해한인교민단 단장을 지냈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또한, 우익과 좌익계열의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노력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안중근과 사촌지간으로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05인사건의 발단이 된 안악사건의
장본인으로 10년 동안 복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경근
안중근의 사촌동생으로 만주에서 활약했다.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보좌하기도 하고,  정의부 군사위원으로도 활동하기도 했으며  윤봉길 의거 이후 군사훈련과 생도모집에 힘썼다.  또 임시의정원 황해도 위원이기도 했다.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춘생
 
안중근과 종질(從姪)지간으로  만주로 망명해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36년 중국군에 배속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항일운동을 시작했으며  1940년부터는 광복군에 소속되어 사병훈련과 정보수집 등을 담당했고
광복군 주난징대장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안봉생
 
안중근과 종질(從姪)지간이자  광복회 회장을 지낸 안춘생의 형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왕예먀오의 동광학교와 헤이룽장성  란시현에서 독립투사를 양성하며  난징의 중앙군관학교에서
임시정부요인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원생
 
안정근의 아들로 1943년 한독당 계통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의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낙생
안공근의 둘째아들로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5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태순
안중근 의사의 숙부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자금 모집 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2009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형
 
안중근의 매제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다.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05인사건 때 옥고를 치른 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항일 투쟁에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오항선
 
그녀는 안중근의 누이동생 안성녀의 며느리로 일제강점기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에 참여하였던
여성 항일애국지사다.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조순옥
 
그녀는 안춘생의 부인으로 독립운동가이며. 광복군에 입대하여 한국청년  초모공작과 정보 수집에 활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홍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 블라디보스토 수청촌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전달했다.
 

위와 같이 무려 40여명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이 계셨으나 정작 도마 안중근의 직계인 아들(준생)과
딸(현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친일 행각으로 민족반역자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위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칭송 받고 존경 받아야 마땅한 가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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