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제와 중국적인 최초의 불교, 천태종
① 수 문제의 불교선택과 수양제의 계승
수 문제는 새로운 통일제국에 걸맞는 지배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선택한다. 이때의 중국 상황은 후한시기 이후 유교는 몰락한 상황이라 이렇다할 측면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위진시대를 풍미한 도가가 개량된 신도가인 현학이나, 강남 육조시대에 유행하는 청담은 지배이데올로기로서는 부족했다. 또 도교는 불교를 통해서 교단체제가 정비된 상황이라서 불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즉 불교 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던 것이다.
또 여기에는 개인적인 수문제의 개인적인 신앙도 작용했다. 문제는 강남의 진을 정복하기 전인 585년 불교를 장려해서 천자보살이라고 불렸다. 또 수가 천하를 통일한 12년 후인 601년의 환갑을 맞아서 불교를 대대적으로 선양하는 포고문을 반포한다. 이는 불교를 통한 제국의 안정과 오랜 전쟁의 상처를 아울러 치료하고자 한 조치로 이해된다. 수 문제는 604년 사망하고 결국 제국의 안정은 수 양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② 수양제와 천태종의 발전
수나라 때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종파는 중국적인 불교 중에서 가장 먼저 대두하는 천태종이다. 천태종은 창시한 인물은 천태지의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배경을 이루는 인물로 혜문(?550?)과 혜사(515~577)가 있다. 혜문과 혜사를 흔히 천태종의 초조와 제2조라 하고 지의를 제3조라고 한다. 이후 천태종은 지의의 가장 충실한 제자인 장안관정(561~632)을 제4조로 형계담연(711~782)을 제5조로하는 계보를 확립하게 된다.
혜문과 혜사는 모두 강북인이다. 그러나 혜사가 남방으로 가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정착한 곳이 남악 형산이다. 이로 인하여 천태종은 남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며, 지의가 입문하게 되면서 기틀이 확립되게 된다. 지의는 절강성 천태산에서 주로 주석하였는데, 지의를 천태지의라고 하며 또 지의의 종파를 천태종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산명에 근거한 것이다.
천태산은 하늘의 북극성과 기운이 통하는 곳으로 본래는 도교의 성산이었다. 이곳에 지의가 주석하면서 불교적인 성산으로 개변된 것이다. 천태산에는 수양제에 의해 창건된 국청사를 중심으로, 지의의 육신을 모신 곳 위에 탑을 안치한 지자탑원과 장안관정과 형계담연의 무덤 등 유적이 현재에도 잘 보존된 채 전해지고 있다.
지의는 577년 남조의 진나라 선제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데, 이는 수문제에게 582년 진왕晉王으로 봉해져 589년 陳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양광에게로 이어진다. 이는 당시 지의의 명성이 강남불교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진왕 양광은 마침내 591년에 지의에게 보살계를 받게 되고, 양광 역시 지의에게 지자대사라는 존호를 올리게 된다. 지의를 지자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의는 596년 천태산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이때는 아직 양광이 수양제가 되기 이전의 진왕일 시기이다.
수나라 때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종파는 중국적인 불교 중에서 가장 먼저 대두하는 천태종이다. 천태종은 창시한 인물은 천태지의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배경을 이루는 인물로 혜문(?550?)과 혜사(515~577)가 있다. 혜문과 혜사를 흔히 천태종의 초조와 제2조라 하고 지의를 제3조라고 한다. 이후 천태종은 지의의 가장 충실한 제자인 장안관정(561~632)을 제4조로 형계담연(711~782)을 제5조로하는 계보를 확립하게 된다.
혜문과 혜사는 모두 강북인이다. 그러나 혜사가 남방으로 가라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정착한 곳이 남악 형산이다. 이로 인하여 천태종은 남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며, 지의가 입문하게 되면서 기틀이 확립되게 된다. 지의는 절강성 천태산에서 주로 주석하였는데, 지의를 천태지의라고 하며 또 지의의 종파를 천태종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산명에 근거한 것이다.
천태산은 하늘의 북극성과 기운이 통하는 곳으로 본래는 도교의 성산이었다. 이곳에 지의가 주석하면서 불교적인 성산으로 개변된 것이다. 천태산에는 수양제에 의해 창건된 국청사를 중심으로, 지의의 육신을 모신 곳 위에 탑을 안치한 지자탑원과 장안관정과 형계담연의 무덤 등 유적이 현재에도 잘 보존된 채 전해지고 있다.
지의는 577년 남조의 진나라 선제에게 크게 존경을 받는데, 이는 수문제에게 582년 진왕晉王으로 봉해져 589년 陳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양광에게로 이어진다. 이는 당시 지의의 명성이 강남불교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진왕 양광은 마침내 591년에 지의에게 보살계를 받게 되고, 양광 역시 지의에게 지자대사라는 존호를 올리게 된다. 지의를 지자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의는 596년 천태산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이때는 아직 양광이 수양제가 되기 이전의 진왕일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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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