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 "박정희의 꿈, 내가 완성시켰다

전두환 회고록 "박정희의 꿈, 내가 완성시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전두환 회고록'은 모두 세 권으로 구성돼 있다. 1권 '혼돈의 시대', 2권 '청와대 시절', 3권 '황야에 서다'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중 3권에 박정희 박근혜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 전 대통령은 "전두환 시대가 없었다면 박정희 시대도 없다”면서 "나는 재임 중 우리 경제가 '단군 이래의 호황'을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완으로 남긴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내가 완성시킨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을 겨냥했던 검찰의 '5공 비리' 수사와 관련해 "정치검찰은 나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정치보복극에 봉사하는 길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썼다.

다음은 발췌한 회고록 내용: 3권- 황야에서 서다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나> 중에서

항간에서는 “박정희 없는 전두환은 없다.”는 말들을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 말에 이어서 나는 “전두환 시대가 없었다면 박정희 시대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10.26 이후 1980년대 초에 우리가 직면했던 국가적 위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 애써 닦아놓은 도약의 토대가 자칫 유실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무의미한 것이므로 그때, 자신의 집권만이 ‘민주화’라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국정을 맡게 되었다면 그 뒤 우리나라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하는 물음을 내놓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재임 중 우리 경제가 ‘단군 이래의 호황’을 누릴 수 있게 만들었고, 아시아 국가 중 두 번째 올림픽 개최국이 되게 했으며, 6.29선언으로 ‘민주화’로의 순조로운 이행을 실현했고, 헌정 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 이양의 선례를 만들어놨다. 그러니까 나는, 박정희 대통령 그 어른이 5.16혁명의 기치를 올리던 때 품었던 꿈을 가장 충실하게 이루어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이 미완으로 남긴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내가 완성시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 세상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신다면 나에게 치하와 감사의 말씀을 하시면 하셨지 자신의 믿음을 배신했다고 하실 일은 없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사람들이 그 말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격하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그 어른을 욕되게 하는 그 어떤 일도 한 일이 없으니 꾸며내서 얘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를 두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계승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박 대통령을 배신했다고 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 내가 그러한 자신들의 욕망 실현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했는지는 모르지만, 박 대통령 그 어른을 배신한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영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고, 유가족으로는 세 자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재임 중 근혜槿惠 양 자매를 몇 차례 청와대로 식사 초청한 일이 있고 그밖에 간접적으로나마 그저 섭섭지 않게 내 진정을 표현하고는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 대통령께서 남기신 재산 내역 같은 것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중 영남대학교는 내가 대통령 되기 전부터 이미 분쟁이 생겼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영남대학교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 자녀들을 상대로 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합수본부장 시절 나는 그 문제를 김옥길金玉吉 문교부장관에게 직접 의논을 드렸었다. 그때 김 장관은 교육자답게 내게 명확한 입장을 얘기해주었다. 대학의 소유권 같은 문제는 법의 판단에 맡겨야지 장관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쟁의 내용을 알아보니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영남대학교 설립 과정부터 직접 관여했던 이후락李厚洛 씨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때 이후락 씨는 신병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나의 부탁을 받고 귀국했다. 나는 이후락 씨에게 박 대통령 유가족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되도록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이후락 씨의 중재로 분쟁이 수습되고 박근혜 씨가 이사장을 맡는 것으로까지 진전됐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사장이 되기 위해선 일정기간 이사직으로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당장 이사장에 취임하지는 못하고 이사로 2년 정도 있다가 이사장에 취임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외에 박 대통령이 남기신 MBC의 지분, 육영재단 같은 것들은 모두 그대로 박 대통령 자녀들이 맡도록 해준 것으로 기억된다. 나로서는 대통령 재임 중 박 대통령 자녀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들은 성의껏 해결해준 것으로 생각한다. 퇴임한 뒤에 있었던 일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박 대통령 자녀들의 재산과 관련해 오해와 논란이 많았던 건 10.26 직후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나온 9억 5천만 원의 성격과 그 처리 과정에 관한 문제인 것 같다. 사실 이 문제는 시끄럽게 논란이 될 문제가 아닌데, 박근혜 씨가 정치를 시작하고 대통령 선거에까지 뛰어들자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공격 소재로 이용됨으로써 불거지게 된 것이다. 

10.26 직후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10.26사건 공범 혐의자인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의 방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금고를 발견하고 합수부의 우경윤禹慶允 범죄수사단장 등 3명의 입회하에 이 금고를 관리하던 권숙정權肅正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하여금 금고를 열도록 했다. 금고 안에서는 9억 5천만 원 상당의 수표와 현금이 발견되었다. 이 돈은 정부의 공금이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자금이었다는 권 보좌관의 진술에 따라 합수부는 이 돈에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권 보좌관이 유가족에게 전달하도록 하였고, 권 보좌관은 전액을 서류가방에 넣어 그대로 박근혜 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박근혜 씨가 10.26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혀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에게 수사비에 보태달라며 3억 5천만 원을 가져왔다. 나는, 당시 격무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합수부 말고도 계엄사령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돼 이 3억 5천만 원 가운데 일부를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한테도 갖다드렸다. 그런데 5.18특별법 제정과 함께 수사를 재개한 검찰은 1996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그 돈을 내가 임의로 사용하였고, 박근혜 씨도 마치 합수부로부터 깨끗하지 못한 돈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발표했다.

그처럼 왜곡된 내용은 1989년 검찰이 이른바 ‘5공비리’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처음 나온 얘긴데, 권숙정 보좌관이 사실대로 바로잡아줬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권의 검찰은 나의 도덕성에 상처를 내기 위해 고의로 이를 묵살해버리고 왜곡되게 발표한 것이다. 1996년은 박근혜 씨가 아직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다. 정치검찰은 나에 대한 김영삼 정권의 정치보복극에 봉사하는 길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0.26 이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영애 근혜 양과 함께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을 주도해왔던 최태민崔太敏 씨를 상당 기간 전방의 군부대에 격리시켜놓았다. 최태민 씨는 그때까지 근혜 양을 등에 업고 많은 물의를 빚어낸 바 있고 그로 인해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혀온 사실은 이미 관계기관에서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최태민 씨가 더 이상 박정희 대통령 유족의 주변을 맴돌며 비행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격리를 시켰으나 처벌을 전제로 수사하지는 않았다. 최태민 씨의 행적을 캐다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 유족들의 명예에 큰 손상을 입히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조치가 근혜 양의 뜻에는 맞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뒤 최태민 씨의 작용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국봉사단 등의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해왔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02년경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총재 이회창李會昌)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미래연합’이란 정당을 만들어 이끌던 박근혜 의원은 나에게 사람들을 보내 자신의 대권 의지를 내비치며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해왔다. 나는 생각 끝에 완곡하게 그런 뜻을 접으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박 의원이 지니고 있는 여건과 능력으로는 무리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고 실패했을 경우 ‘아버지(박정희 대통령)를 욕보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하라고 했다. 나의 이러한 모든 선의善意의 조치와 충고가 고깝게 받아들여졌다면 나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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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