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6.25를 둘러싼 역사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좌우 진영싸움으로 격상되고 있다. 65년 전 남북으로 갈려 서로를 겨눈 총부리는 현재 좌우로 갈려 포화를 퍼붓고 있다. 6.25는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 ‘피 흘리는 6월’이다.
6.25를 앞둔 남남갈등의 대표적인 사안은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역사논쟁이다. 백 장군은 ‘6.25의 영웅’으로 불리지만, 일부진영에선 그를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기를 하고 있다.
백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현대사 전반에 대한 평가와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념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올해도 백 장군을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원수로 추대하자’는 주장과 ‘명예원수는 절대 안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미 정부는 지난 2010년에도 6.25 60주년을 맞아 백 장군을 창군 사상 최초로 5성장군인 ‘명예원수’로 추대하려다가 진보진영의 반발에 부딪혔다. 한국사회는 갈등이 구조화된 사회인지라 ‘영웅이 탄생하기 힘든 세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백 장군의 업적에 대해선 그를 부정하는 세력에서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국군 첫 대장에 오른 백 장군은 6.25때 사단장과 군단장을 거쳐 32세에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북진 때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다부동전투를 비롯해 당시 여러 기념비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던 중 광복을 맞아 26세 때 미군정이 조직한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29세에 1사단장으로 재임하며 군을 지휘했다.
육군 1사단은 6.25 전쟁 기간 중 총 112회의 전투에 참가해 북한-중공군 8만2000여명을 사살하고 6900여명을 생포했다. 이에 육군 최초 창설부대 육군 1사단은 지난 2010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사단 사령부 전진광장에 백 장군 기념석을 세웠다.
백 장군은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육군 1사단장에 취임한 뒤 다음해 4월 1군단장을 거쳐 전훈을 인정받아 1952년 32세의 나이에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 자리까지 오른 한국전쟁 영웅이다. 장군은 정전 이후 한국군의 재건과 기강 확립, 국방력 강화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고, 초대 1야전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최초로 야전군을 창설하기도 했다.
오히려 백 장군은 미국에서 ‘논란의 여지없는’ 전쟁영웅으로 통한다. 주한미군 사령관이 이-취임식 때마다 연설에서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으로 시작하는 게 전통이다. 6.25전쟁 당시 참상을 설명하는 그의 육성은 6월 미국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미 국립보병박물관 한국전 전시관에 영구 보존됐다. 또한 미국의 주요 군사학교에선 백 장군이 승리로 이끈 다부동전투의 회고록을 수업 교재로 활용할 정도다. 당시 백 장군은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너희들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며 부하들을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백 장군은 1940년대 일본군(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는 이력 때문에 친일파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 진보진영은 물론 여의도 정치권 일각에서도 그를 “민족 반역자”라고 비하했다.
이에 허남성 국방대학교 명예교수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을 두 차례나 지내면서 오늘날의 육군이 되도록 증강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등 여러 가지 시스템을 반석위에 올려놓는 역할을 한 분”이라며 “백 장군이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백 장군의 ‘독립군 토벌부대 근무’경력 논란에 대해선 “당시 독립군의 정체를 잘 알아야 한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6.25전쟁 때에 북한군으로 들어가서 북한군의 주력부대에 일부가 돼 남침을 했던 사람들”이라며 “이를 우리가 똑바로 보지 않고서 마치 항일만 하면 다 독립군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박세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은 “백 장군이 흠이 있더라도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는 데 큰 공적을 세운 일등공신”이라며 “(백 장군에 대한 반대여론을 보니)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이 시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성인 대우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작 ‘6.25에 대한 기억’은 국민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특히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6.25발발연도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전행정부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과 중·고교생 청소년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 안보의식 여론조사를 벌인 조사에서 ‘6.25전쟁 발발 연도를 주관식으로 쓰라’고 하자 성인의 35.8%, 청소년의 52.7%는 잘못된 답변을 적었다.
성인과 청소년들 가운데 상당수가 6.25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잊혀진 전쟁’이 된 것이다. 그만큼 6.25역사가 왜곡-변질될 가능성도 커졌다. 여기에 사회 곳곳에서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해 지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마저 거꾸로 돌게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일이라는 지적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6.25역사 바로 세우기’를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24일 6.25참전유공자 위로연에 참석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치른 희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후세들에게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며 “앞으로 여러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후세들에게 6.25전쟁을 정확하게 알리는 올바른 역사 교육도 반드시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당시 전쟁에 참여한 용사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뤄졌다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현대사의 큰 상처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물지 않았고, 오히려 후세에서 후벼 파 덧나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 인식에 대한 ‘민낯’이다.
전쟁영웅을 비하 매도하면서 진보진영이라 일컫는 정당과 시민단체는 길거리 ‘영웅’ 양산을 부추기고 있다. 국책사업과 정부의 현안사업에 무조건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는 물리적인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소위 ‘길거리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마치 자신이 나라를 구한 ‘영웅’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법의 준엄한 심판을 매도하며, 자신은 마치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공안탄압(?)에 의해 교도소에 들어감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니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야당의 정치세력과 줄을 대어 정치권에 입성한 사례가 있듯이 정치권과 진보진영이 ‘길거리 영웅’을 양산하는데 일도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민중궐기대회는 ‘길거리 영웅’ 콘테스트 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이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국자전복, 대통령 하야를 외치니 어찌 순수한 집회로 볼 수 있겠는가 말이다.
특히 그 집회를 주도한 한상균 민주노총(민노총) 위원장이 한 달 가까이 자신을 품어줬던 조계사를 향해 ‘절간’이라며 비수를 꽂고 떠났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한 위원장은 이날 떠나기 직전 민노총 간부들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절간’에서 많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고 분노도 키워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계종단이 계급적 관점으로 우리와 동질하지 못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였다“고 말했다.
또 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언론을 질타하고, 연행되기 직전까지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투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어 “잠시 현장을 떠나지만 총파업 투쟁을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감옥과 법정에서도 투쟁을 계속 할 것"이라며 오직 투쟁을 목적에 두고 있었다.
한상균은 조계사에 도피 중이던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유폐’, ‘정권의 하수인’ 등을 언급하며 조계사와 신도회를 비난했다. 조계종단이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않고 나가라고 한 데 불만만 쏟아냈다. 한상균은 “불교의 총본산 조계사에 인생을 의탁한지 22일이 됐다.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한 신도회 고위급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면서 “사찰은 나를 철저히 고립유폐 시키고 있다. 그 전술은 자본과 권력의 수법과 다르지 않다”며 민중선동을 부채질 할 뿐이었다.
이에 조계사 관계자들은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한 달 가까이 보듬어준 사찰을 떠나기 직전에 '절간'이라니, 그게 할 말이냐", "스스로 불자라면서 사찰 안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렇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일부 언론과 사회가 마치 한상균을 ‘영웅’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전쟁영웅’은 사라지고, ‘길거리 영웅’만 득실거리게 한 공동의 책임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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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