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20세기 전반 항일무장투쟁과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한민족의 20세기 전반 항일무장투쟁과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2020년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많다. 4·19혁명 60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6·25전쟁 발발 7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있었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일명 청산리전투)의 10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사를 개관하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진상과 그 의미를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에 주는 시사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20세기 전반 한민족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흐름

일본의 조선(한국)에 대한 침략은 1894~95년경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요와 대한제국 외교권의 박탈은 사실상 식민지화의 첫걸음이었다. 이에 대응해 전국 각지에서 민간의 자발적 의용병인 의병이 봉기했고, 1910년 8월 전후 시기까지 치열한 의병 전쟁을 전개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지사들은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펼쳤다. 대표적 방안이 이른바 독립전쟁론,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등이다. 이 가운데 실천은 어렵지만,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략이 ‘독립전쟁’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일 전쟁설’이 부각되면서 1919년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듬해 초부터 강력한 ‘독립전쟁론’을 주창하며,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포섭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 무렵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의 독립군 단체는 임시정부 봉대를 표방하며 ‘독립전쟁’에 떨쳐나서게 되었다.

 

독립운동이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이 자주국가의 수립과 자립경제의 실현, 제국주의·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상태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투쟁하는 근대의 총체적 민족 저항운동을 말한다. 독립군이란 “1860년대 이래 이주 한인(韓人)들이 거의 100만에 달했던 중국 동북지방(만주)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1910년대에 편성되어 1930년대 말까지 한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강인한 항일 독립전쟁을 벌였던 한민족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부대)”이라 정의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중국 동북으로 이주한 한인(韓人)들은 어려운 조건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며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등을 통한 인재양성, 서로군정서와 대한통의부, 간도국민회와 대한독립군, 정의부·참의부·신민부, 1930년대 전반기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한족자치연합회와 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 등 민족자치 및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여러 기관의 활동은 매우 유명하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독립군의 첫 승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당·정·군이라는 새로운 조직 형태를 갖춘 독립군 항전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20세기 초, 세계 국가의 2/3 이상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 통치를 받거나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었는데, 우리 민족처럼 끈질기게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항거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직접·간접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과 의미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청산리대첩의 또 다른 주역인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과 그에 관한 기사 (동아일보, 1930.01)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의 개요와 의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산리대첩은 우리 민족 독립전쟁 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전투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장군의 주도로 구성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19사단 월강(越江)추격대대를 1920년 6월 7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격퇴한 전투였다. 이는 한민족 독립전쟁 사상 일본 정규군과 싸워 대승한 최초의 전투로 유명한데, 당시 연변의 한인 동포들은 이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매우 높이 평가했다. 봉오동전투의 대승으로 전체 독립운동 진영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고, 3·1운동 이후 다소 침체되었던 독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도 다시 품게 되었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대규모 탄압 대책을 추진했다. 일본 당국은 일부러 중국인 마적단을 동원해 1920년 10월 2일 훈춘(琿春) 일본영사관을 습격, 방화하는 ‘훈춘사건’을 일으켰고, 10월 14일에는 이른바 ‘간도 출병’을 선언한다. 특히 독립군 ‘토벌’을 위해 한국 주둔 19사단과 20사단 일부, 러시아 극동지방인 연해주 주둔 11, 13, 14사단 일부 등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5,000여 명의 엄청난 독립군 탄압부대를 편성했다.

 

일본군의 중국 연변지역(북간도) 침략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연합부대를 재편성하고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이해 여름, 백두산 동북의 청산리(靑山里) 방면으로 먼저 이동한 독립군은 7개 부대 1,400여 명에 달했으며, 600여 명에 달하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정식 명칭은 대한군정서) 부대도 9월경, 청산리 쪽으로 이동해 일대 결전에 대비하였다. 청산리 일대의 ‘독립전쟁’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안무(安武), 허근(許瑾) 등 2,000여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동안 중국 연변의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아즈마(東正彥)지대를 상대로 대소 10여 차례 격전을 치른 끝에 패퇴시킨 일련의 전투였다. 이는 독립전쟁 사상 최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청산리독립전쟁 가운데 완루구전투와 고동하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수행한 전투이고,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였다. 어랑촌전투와 천보산전투는 양대 독립군 세력이 함께 싸운 전투다.

 

봉오동전투 현장 봉오저수지 - 박도, 2004

 

‘청산리전대첩’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좌진 부대가 수행한 전투로 알려졌지만, 당시 전황과 일제 측 자료를 토대로 검토한 결과, 홍범도 연합부대의 활약도 매우 큰 것으로 판명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대종교(大倧敎) 세력이 중심이었고,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홍범도부대는 연변지역의 기독교 세력과 러시아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양 부대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전투 시에는 서로 돕는 상호보완 관계였다.

 

청산리대첩의 전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임시정부와 중국, 러시아 측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일본군 살상 600여 명 내외, 독립군은 150여 명 내외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소위 “간도 출병”은 완전히 실패했고, 독립군을 ‘소탕’하겠다는 호언은 헛소리가 되고 만 것이다.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지도체제가 상이한 10여 개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절묘하게 통합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투철한 사명감과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자세, 개인적 영달보다는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전체 독립군의 단합과 생존을 도모하려는 절체절명의 의지와 화합 정신이 있었다. 주민들의 헌신과 정보제공 등 민중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되어 싸운 독립군 부대 간의 연락과 소통이 원활했던 것도 승리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독립군부대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기민한 유격 전술을 구사했던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은 자체 평가에서 독립군이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과 기습, 치고 빠지는 기동전을 벌이고, 예상 밖의 강한 화력을 갖고 있어 결국 실패했다고 정리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군의 만행‘경신참변’실상

봉오동전투 직후 홍범도 독립군 부대와 싸웠던 일본군은 홍범도가 “일반 조선인 특히, 그 휘하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있다”고 매우 높이 평가했다. 간도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이 1920년 8월 27일 중화민국의 행정 책임자인 연길도윤(延吉道尹) 도빈(陶彬)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를 보면 홍범도의 인품과 나라 사랑, 헌신에 대해 극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홍범도 장군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소위 ‘의병대장’으로 왜적과 여러 번 싸워 대승을 거두어 상대할 적이 없었고, 왜인들이 ‘날으는 장군(飛將軍) 홍범도’라고 부르며 감히 접근이나 저항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우리의 이번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오동 전승’ 역시 홍범도 장군의 공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홍장군의 일편단심으로 인한 것이며, 홍장군의 마음속에는 오직 나라가 있을 뿐이고, 자기 몸과 가정은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음과 몸을 다하여 독립운동에 열성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칠 정도로 헌신하고 있으니, 우리 동포 모두가 숭배하고 믿지 않는 자가 없을 지경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43권) 이러한 구춘선의 서신 내용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홍범도는 동포들의 성원에 대한 결사 항전의 보답 의지와 부하 독립군들에 대한 강한 정신교육이 유명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일제 정보자료에 상세히 파악되어 여러 차례 보고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결사 응전과 승전소식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1921년 2월 청산리전투 승전보를 들은 마산의 애국 청년 이정문을 비롯한 7명이 승전 소식을 실은 격문을 경남 창원군 구산면 사무소에서 등사해 수백 부를 시내 주요 장소에 배포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씩 실형을 선고받고, 마산과 개성 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동안 청산리대첩의 실상이나 전과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그 진상이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되었다. 이 시기 일본 군경은 중국 영토인 중국 연변(북간도)과 남만주 서간도 지방에 침입하여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온갖 학살 만행과 폭행, 각종 탄압행위를 자행하였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체계적 규명은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이제 각종 자료를 종합해 경신참변의 피해 상황을 검토·종합하고, 잊혀진 무명의 희생자와 의인, 영웅들을 심층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각종 통계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추후 진상규명과 대일 사죄, 보상과 배상요구도 시급하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전신 대한군정부 직인

 

더불어 최근 봉오동·청산리전투의 한계와 독립군 부대 간 결속력의 문제, 전투 실상의 과장 여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당시 국제정세와 우리 민족운동의 역량,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나아가 러시아 혁명 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거시적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동북아역사재단 신효승·독립기념관 신주백 소장의 『역사비평』게재 논문[2018·2019년]). 또, 최근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청산리대첩 당시 대종교 세력의 무기구입과 운반, 북로군정서의 역할 등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봉오동, 청산리전투가 외국 학계에서도 관심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사사 미츠아키[佐佐充昭],『朝鮮學報』242집, 2017 참조).

 

한민족이 만주 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1910년까지 지속되었던 전제군주제 체제를 청산하고, 해방 이후 건설할 근대 국민국가의 정체로 민주 공화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 한인 교민들을 기반으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이를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들, 무명 용사들로부터 온갖 어려움을 무릅쓴 ‘결사항전’의 주체적 독립투쟁 정신을 발견한다. 국내외적으로 엄중한 현실 상황에서 우리는 특정 군주나 개인이 아닌 ‘공화주의’를 지향하면서 조국·민족·공동체에 대한 헌신, 국민이 주인 되는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열정과 자유·정의 실현의 이상을 몸소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경험과 역사, 그 의미와 교훈에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출처: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장세윤 동북아재단 명예연구위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