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이야기 1

조선통신사 이야기 1

 

기자는 지난 2019년 연말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부관 훼리(釜關-號)를 타고 그 옛날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가보았다.  5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 될 조선통신사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던 역사의 흔적들을 상기 시켜 줄 것이며, 한일관계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부관훼리는 국내에서 유일한 국적선 선사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905년(고종 42) 9월 11일 일본 산양철도와 일본철도가 이키마루호를 투입하여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부산과 시모노세키 두 항구 사이에정기적으로 격일제로 운항한 관부 연락선이 시초이다.  해방 이 후  1949년 4월에 항로가 전면폐쇄 되었으나,  국교 정상화 이 후  1967년과 1968년 한일 경제 각료 회의에서 부산~시모노세키 항로 개설이 논의되어 연락선에서 '페리' 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운항 되었다. 이 후  한일 관계가 정상화 되었다고 하지만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1969년 8월30일에 설립되어,  이듬해인 1970년 6월 19일 해방 후 처음으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복하는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여객선이 출항하였다.  이때 여객 234명과 승용차 30대를 적재한 3,800톤급 관부 훼리호가 투입되었다.  그 후 선박의 규모가 커지고 시설이 고급화되었다.  1976년 7월 10일 5,200톤 급 페리로 대체되었다.  1983년 4월 27일 5,632톤 급 한국 국적선 부관 훼리호가 출항하면서 매일 항로를 운항하였다. 

  부관페리 하마유호

하마유호 선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연

 

1998년 8월 28일 1만6187톤 급 호화여객선 하마유호가 관부 훼리호 대신에 투입되었다.  2002년 5월 22일 1만6665톤 급 호화여객선 성희호가 부관 훼리호 대신에 투입되었다.  2011년 5월 현재 한국 국적 선박으로는 성희호가 운항하고 있고 일본 국적 선박으로는 하마유호가 운항하고 있다. 이 후 부관훼리는 50년 넘게 무사고 운항을 하고 있다.본 기자는 하마유를 타고서 현해탄을 밤새워 건너갔다.

 

조선통신사의 시작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2019년은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었던 해였다,   <조선통신사 이야기> 연재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본다.

 

‘조선통신사’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막부 쇼군 또는 히데요시에게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로,  쇼군의 즉위 축하,  일본의 태평泰平 축하,  외교적 현안 해결 등을 목적으로 했다.  조선통신사라는 표현은 연구자들이 채용한 학술 용어다.  사료상 으로는 ‘信使’, ‘통신사’,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조선내빙사朝鮮來聘使’,  ‘조선빙례사朝鮮聘禮使’ 등으로 칭했다.

 

오늘날 조선통신사라 하면 흔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통신사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으로 파탄에 빠진 양국 관계를 평화로운 선린 관계로 이끈 외교 사절이자,  ‘필담창화筆談唱和’로 상징되는 시문時文 교류를 통해 조선의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알린 문화 사절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도요토미豊臣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德川 신정권이 수립되면서,  조선통신사는 1607년에서 1811년에 이르기까지 총 12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그런데 광의의 조선통신사는 훨씬 이전인 조선 전기부터 시작되었다.  조선 건국 후 30여 년이 지난 1429년을 시작으로 1439년, 1443년, 1590년, 1596년 등 총 5회의 파견이 있었다.  주목할 만 한 점은 1443년 파견 이후 1590년까지 무려 약 150년 동안 단 한 번도 파견되지 않았고,  그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난 1592년에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전쟁이 진행 중이던 1596년에 우리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가 변화하는 가운데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조선통신사 탄생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기도 한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파견하여 왜구 단속을 요청했다.  고려 말 이래 한반도가 왜구의 약탈에 시달렸던 만큼 조선 초 대일본 외교의 기조는 왜구 금압이었다.  막부의 쇼군을 비롯하여 일본 각지의 호족들에게 왜구의 금압과 납치된 조선인의 송환을 요청하는 한편,  왜구를 평화로운 통교자로 전환시키는 정책이 병행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요시미츠義滿는 왜구에 의해 납치되었던 조선인 100여 명을 송환해주면서 조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답서를 보냈다.

 

1392년 일본 내에서 남북조南北朝의 혼란을 통일한 쇼군 요시미츠는 쇼군 명의의 외교 문서를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에게 전달하여,  1402년 영락제로부터  ‘일본 국왕日本 國王’으로 책봉되었다.  이는 일본이 그간의 외교 관습에서 벗어나 명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안에 새로이 편입되었음을 의미했다.

요시미츠는 1404년 일본 국왕 자격으로 조선 국왕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양국 정부 간에는 활발한 사신 왕래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무로마치 쇼군이 파견한  ‘일본국왕사’의 조선 방문이 약 60여 회 이루어졌고,  조선도 약 60여 회의 사절을 일본 각지에 파견했다.  조선 전기에 쇼군 앞으로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통신사 이외에도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회답사回答使 등으로 매우 다양했으며 모두 18회에 이른다.  그중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한 것이 6회,  교토까지 가서 사명을 완수한 것은 3회다. (표 참조)

조선의 경우 일본 중앙정부의 수장인 막부 쇼군보다도 쓰시마 도주를 비롯한 지방호족들에게 파견한 사절이 훨씬 많았다. 이는 조선전기의 대일 외교가 막부 쇼군뿐만 아니라 지방 호족들과도 개별적으로 통교하는 다원적인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통신사는 대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중심으로 수송 담당, 의사, 통역, 악대樂隊, 군관軍官 등 약 90~1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 통신사가 400~500명으로 편성된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하카다博多·아카마가세키赤間關·효고兵庫에 이르면,  사절단은 일시적으로 그곳에 구류되었다.  그 사이 막부에 사자가 파견되어 입국과 교토 진입을 타진했고 진입 허가가 떨어지면 교토로 이동해서 쇼군에게 국서國書를 전달했다.  수로와 육로를 교대로 가는 험한 노정을 왕복하는 데 9~10개월이 소요되었다.

 

1429년 사행을 전후하여 조선은 1422년과 1432년에도 쇼군 앞으로 사행을 파견하기는 했으나 도중에 해적을 만나는 바람에 임무를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1443년의 통신사 이후 조선 정부는 막부 쇼군과 쓰시마 도주 이외에는 사절을 거의 파견하지 않았다.  이는 왜구가 진정되고 통교 체제가 확립되자 일본에 대한 사절 파견에 점차 소극적으로 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쇼군에게 보내는 통신사도 실질적으로 쇼군을 접견하여 국서 전달 임무를 완수한 1443년 사행 이후로는 오래도록 성사되지 못했다.  1459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대장경· 법화경 증정을 위해 통신사가 출발하기는 했으나 해난 사고를 당해 일본에 도착하지 못했다.  성종 시대에도 두 차례 통신사가 계획되었으나 일본의 정세 불안으로 인해 사절단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기되었다.

 

1443년 사행으로부터 차기 사행이 성사된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2년 전인 1590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통신사가 무려 150년 만에 일본 땅을 밟은 것이었다.

조선 전기 통신사와 관련하여 가장 저명한 조선의 문헌 기록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이다.  1443년 사행에서 서장관으로 동행한 신숙주가 일본에서 돌아와 저술한 것으로 1471년에 간행되었다.  성종의 명을 받아 작성된 「해동제국기」에는 일본의 황실과 쇼군,  지명,  국정國情,  교린 왕래의 연혁,  사신접대절목使臣接待節目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과 유구에 관한 조선 외교의 기초 정보로 기능한 문헌인 만큼 오늘날 조선 전기 조일 관계 연구에 불가결한 귀중한 사료이다.

 

 

임진왜란 직전, 히데요시를 직접 만난 조선통신사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0여 년 만의 ‘통신사’

통신사는 대등한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상징한다.  조선은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쇼군將軍에게 통신사를 파견한바 있었다.  그러나 1443년 이래 통신사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의 오랜센고쿠시대戰國時代는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의해 종결되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지역 제패를 눈앞에 두었다.  규슈 지역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그에게 결국 굴복하였다.  이제 일본에서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은 오다와라小田原 의 호조北条 가문 정도였다.

한편 규슈에 진입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영주인 소宗가문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았다.  히데요시는 쓰시마가 주선하여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와서 자신에게 항복의 예를 바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 국왕 즉위 축하’와 ‘조선의 항복’ 사이

조선 국왕과 막부 쇼군의 관계는 단절 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다시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대등한 형식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국왕이 와서 항복하라니,  조선이 이 요구를 들어 줄리는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쓰시마는 그의 요구를 그대로전하지 않고,  일본에 새로운 왕이 즉위 했으니 축하사절을 보내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을 설득하고자 했다.

조선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통신사요청에 당황했다.  게다가 접촉해 온이는 이전에 관계를 맺었던 무로마치막부의 쇼군도 아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왕위’를 찬탈 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조선은 우선 이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쓰시마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2년 후인 1589년,  이번에는 쓰시마의 영주인 소요시토시宗義智가직접 조선에 건너와 교섭에 임했고,  이전에조선의 해안을 약탈하였던 조선인 해적 두목과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송환 한다는 조건으로 통신사파견에 동의해주었다.  통신사를 이끄는 세 사신에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선발되었다.  통신사는 1590년 3월, 한양을 출발하였다.

 

히데요시를 만난 조선 사신

1590년 7월 일본의수도인 교토에도착한 통신사는 몇 달 동안이나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남아있던 저항세력인 호조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오다와라에가 있던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호조 가문으로 부터 항복을 받은 후에야 교토로 돌아왔다.  통신사는 11월이 되어 겨우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통신사는 이 자리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다.  이 통신사는 조선인 중에서 히데요시를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절이었다.  통신사는 이때의 감상을 남겼는데,  먼저 히데요시의 용모는 왜소하고 추하며 얼굴빛이 검고 피부가 주름져 마치 원숭이 같았으나,  눈동자가 번쩍이며 사람을 쏘아보았다고 한다.  접견례는 통신사에게 매우 생소하였다.  연회 음식은 단출하여 떡 한 접시와 옹기 사발에 담은 탁주가 전부였다.  술을 나누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의례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접견 자리에 자신의 아기를 안고 나와 조선 악공들의 연주를 감상하였는데,  아기가 옷에 오줌을 누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시녀에게 아기를 넘겼다고 한다.  통신사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외교 의례를 무시하는 듯 한 이러한 행동을 ‘방약무인傍若無人’이라는 글자로 표현했다.

 

 

 

 

 

사행단의 보고와 전쟁의 위협

조선 국왕이‘일본 국왕’에게 보낸 국서를 전달한 후,  통신사는 귀환 길에 올랐다.  조선국왕의 국서에 대한 ‘일본국왕’의 답서는 통신사가 교토를 떠날 때까지도 전달되지 않았다.  통신사는 며칠 후 오사카에서국서를 전달받았는데,  그 내용은 매우 놀라웠다.

‘조선 국왕전하殿下’라고 해야 하는 것을 낮추어  ‘합하閤下(혹은 각하閣下)’라고하고,  ‘예폐禮幣’라고 해야 하는 부분을 조공품 이라는 의미를 담은‘방물方物’이라고 하는 등,  조선을 한 단계 아래로 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조선의 투항을 기정사실로 하고,  앞으로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니 조선이 합류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조선의 항복’으로 제멋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통신사는 수정을 요구했고 긴 논의 끝에 비교적 온건한내용의 수정된 국서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러나 통신사는 원래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1591년 2월 부산에 도착한통신사는 즉시 한양으로 가서 보고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계획 하고 있다는 정황은 명백했다.  정사 황윤길을 비롯한 통신사 일행은 대부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흥분했으나,  김성일 만은 그 에 반대하면서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아 두려워 할 만한이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후일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전쟁 위기론에 반대한 이유를 묻자 그는 ‘나 역시 어찌 왜적이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모두가 놀라고 현혹될까 우려되어 이를 풀어주려 하였던 것 일 뿐이오. ’라고 답했다.  김성일은 교토에서 쓴 시에서,  화려한 저택이 늘어서고 백성들의 집도 가득하며 물자도 풍부하나,  전쟁을 그치지 않으니 전쟁이란 불과 같아서 그치지 않으면 자신도 타고 말 것이라며 경계한 바가 있었다.  조선이 ‘좋은 뉴스’인 김성일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명나라에 일본의 상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인지하고 있었다.  관건은 언제 어디서 침략이 시작되느냐에 있었다.   /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윤유숙,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김경태, 고려대학교 CORE사업단 연구교수)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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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