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학살사건 提巖里虐殺事件
지난 27일 한일친선 선교협력회 소속 일본기독교인 17명이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17명의 사죄단이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방문하여 엎드려 사죄했다.서울에서 일본인 개척교회 목사로 39년째 일본의 만행을 사죄하고 있다는 요시다 코즈 목사가 순국기념비 앞에서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사죄 방문단을 이끌고 온 일본인 오야마 레이지 목사의 대표기도가 진행됐다.그는 “주여, 식민 통치 시절 일본 관헌들에 의해 가장 험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 제암교회였다”며 “당시 일본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다”고 말했다.이어 “그럼에도 일본 정치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며 “나쁜 짓을 하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이후 기념관 내에서는 제암리 사건에 대한 동영상이 방영됐다. 이들은 이 동영상을 시청하고 재건된 제암교회 예배당에서 강신범 제암교회 원로목사의 증언을 들은 후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사죄했다.
3.1운동과 제암리학살사건 100주년을 맞아 한일친선선교협력회 소속 일본기독교인 17명의 사죄단이
27일 오전 제암리 순국기념관 교회예배당 바닥에 꿇어 엎드려 사죄하고있다.(사진 연합뉴스)
1919년 4월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후 계속되는 시위에 대한 경고와 보복으로, 일본 육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외부에 알려졌으며,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와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교회가 있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 교회(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는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 후 교인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 건물이 마련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 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한 후에,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사격 끝에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했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처럼 3월말을 전후로 만세 시위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일본군의 몇 개의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제암리 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몇 사람이 발안 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경찰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 민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했다. 후에 이 사건은 '수촌리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불타버린 제암리교회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 보병 79연대 소속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이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그들은 4·5만세 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유인하여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이도록 한 후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짚더미를 던지고 석유를 끼얹은 후에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송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군필 (한국불교 일련정종 정장화 회장 조부)
23인 순국 합장묘지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하여 남자 21명,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 H. H., 元漢慶)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생존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겁에 질린 채 언덕 옆에 모여 있었고, 일본헌병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살해된 시체와 불탄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더우드는 현장에 모여 있는 생존자 일부를 만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서 참상을 확인하였다.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W.)박사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는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스코필드는 일본헌병 몰래 현장사진과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에서 발행한“독립운동사 - 3.1운동사”등을 통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또 영국영사 로이드 등도 각기 학살 현장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였다. 또한 이후부터 침묵을 지켜오던 일본 내의 영자 신문『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이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 기독교동맹은 뒤늦게나마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제암리 현장을 직접 찾아본 일본인 영문학자 사이토[齋藤勇]는『복음신보(福音新報)』에 「어떤 살륙사건」이라는 장편시를 발표하여 일본 군경의 만행에 대한 지식인의 통분을 읊기도 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다 중위에 대한 처벌은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하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다가,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다.(판결문 아래사진) 그러나 처벌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뻔한 일이다.
학살책임자인 일본군 장교 아리다 중위의 재판 결과서
이 사건을 알린 스코필드 박사(한국명 석호필)는 3 ․ 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로, 일제에 의해 반강제로 추방된 후에도 전 세계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1958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서거할 때까지 후학을 키우는 한편, 고아와 어려운 학생을 돌보는데 여생을 바쳤다. 현재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유일한 외국인으로 안장되어 있다. (한때 한국인들도 많이 본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2006~2009 방영)>의 주인공 스코필드가 석호필로 불린 것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스코필드 선교사의 한국 이름에서 유래한다)
참조 : 한국문화중앙연구원
<저작권자 ⓒ 한국역사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