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에서 다시 보는 일본의 원폭투하2

나가사키 원폭투하

 

1 - 고쿠라의 폭격실패로 나가사키가..

 

히로시마의 원폭공격에도 일본은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다시 원자탄을 이용한 공격을 준비했다

8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작전시 관측기를 조종한 찰스 스위니 소령은 티니안 섬으로 귀환한 직후 에놀라 게이의 사령관이었던 폴 티베츠 대령으로부터 다시 원폭공격계획이 있다고 말하곤 그 목표로 후쿠오카 현의 고쿠라(현 키타큐슈)를 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고쿠라 원폭투하는 히로시마와 같은 형태로 추진되어 스위니를 비롯한 10명의 승무원들은 복스커 호에 배치되어 폭탄투하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레이더 요원인 제이크 비저 중위, 원자폭탄을 담당할 프레데릭 어슈워스 해군중령, 필립 번즈 중위의 3명이 복스커의 핵심인물로 지정되었다.

89일 오전 940분에 고쿠라로의 폭격작전이 개시되어 944분에 투하지점인 고쿠라 육군병기공창 상공에 도달했지만 현지의 기상악화로 인해 폭격수였던 커밋트 비한 육군대위가 폭탄투하지점의 시야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다른 루트로 다시 폭격위치를 잡으려 했지만 악천후와 일본군 항공기의 반격징후에 의해 고쿠라 원폭 폭격대는  오전 1030분에 고쿠라 상공에서 철수했다.

복스커 호는 고쿠라를 벗어난 직후 나가사키의 관측기로부터 기상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을 듣고는 고쿠라 실패시 제 2차 폭격예정지였던 나가사키로 향했다.

스위니는 바로 자동조종으로 바꾼 후 기수를 비한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요원들과 같이 폭탄고로 가서 공업지대를 목표로 고도 9,000m에서 Mk-3 핵폭탄 팻맨을 수동으로 투하했다.

팻맨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해 약 1분 후인 오전 112분에 나가사키 중심부에서 약 3km 떨어진 별장의 테니스 코트 상공 고도 503m에서 폭발했다.

복스커 호는 폭탄투하 후 충격파를 피하기 위해 북동방면으로 155도 선회하며 급강하했다.

폭탄 투하 후 후방의 관측기가 관측용 낙하산을 떨어뜨렸고 폭발영상은 16mm 컬러필름에 350초간 영상이 기록되었다.

복스커는 예정에 없던 고쿠라에서 나가사키로 선회비행한 탓에 연료가 부족하여 오키나와에 긴급착륙했다. 그곳에서 두리틀 공습의 지휘관이었던 두리틀 중장과 회견 후 오후 5시에 재이륙하여 밤 116분에 티니안 섬으로 귀환하였다

나가사키 폭탄투하의 책임자 찰스 스위니 소령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맨의 폭발직후 생겨난 거대한 버섯구름


2 - 전쟁의 종결이 다가오다.

 

당시 나가사키는 관측용 B 29의 출현에 아침부터 경계경보가 내려져 일단 대피한 시민들이 많았지만

B 29가 되돌아가고 오전 10시를 넘기자 경보가 해제되어 대다수의 노동자, 징용자,

여자 근로대는 군수공장으로 작업을 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하지만 스위니의 원폭 폭격대의 팻맨은 우라카미(浦上)지구 중심에서 폭발해 이 지역은 완전히 괴멸해버렸다.

또 나가사키의 중심지는 폭심지에서 3km떨어진 곤비라 산(金比羅山)등 많은 산악지대에 의해 차단되어 피해가 덜했는데 차단효과가 없던 연안지대는 피해가 컸다. 특이한 것은 히로시마 피폭 후 나가사키로 피난한 히로시마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들에겐 두 번의 비극을 겪게 된 것이다.

당시 우라카미 천주당에는 미사를 집행중이던 신부 및 신도 전원이 열선과 건물붕괴로 즉사했으며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의사, 환자 및 나가사키 형무소, 포로수용소의 영국, 네덜란드 등의 연합군 병사들도  전원 사망하였다.

나가사키 원폭은 플루토늄 239를 사용한 원자폭탄으로 나가사키에 사용된 원자폭탄 팻맨은 TNT화약 22,000톤을 한번에 터뜨리는 위력과 맞먹는 것이었다. 이 규모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 235의 리틀보이보다 약 1.5배 더 강력한 위력이었다.

나가사키 시는 주변이 산으로 둘로싸인 것이 특징인 지형이었기 때문에 열선과 폭풍이 산에 차단되어 히로시마보다는 피해가 작았지만 주변이 평지였던 지대에 주로 주거지와 건물들이 모여 있어 인명피해는 히로시마의 피해를 초과했다.

당시 나가사키 시의 전체인구는 약 24만이었는데 그 중 74천명이 사망하고 시의 건물 36%가 파괴되었다.

두 번째의 원폭공격에 일본군부는 더 이상 전쟁의 수행은 이제 어렵다고 보게 되었다.



원폭에 의해 파괴된 우라카미 천주당


원폭투하 후 허허벌판이 된 나가사키 시 우라카미 일대. 중간의 건물이 우라카미 천주당이다.


우라카미 역 근처에서 피폭해 사망한 엄마와 아기..


원폭투하 후 생존자를 이송중인 구조대원들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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