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을 앞두고 이완용을 다시 한번 알아보자.

100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을 앞두고 이완용을 다시 한번 알아보자.
정말 단순한 매국노였을까?
정말 역사적 인물 팩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  우리의 왜곡은 없었을까 ?


李完用



✔ 李完用をもう一度考えて見る 本当に単なる売国奴だったのか?


売国奴、李完用(イ・ワンヨン)は朝鮮時代末の最高の忠臣であり、朝鮮を米国式に近代化しようとした開化家である。 また、清の属国だった朝鮮の独立を、一線の現場で最も多くの努力をして来た憂国の士だ。
高宗(コジョン)に対する忠誠心を一度も裏切ったことがなく、日本語も英語も全て駆使したが、日本と協議をする時にも通訳を置き、わざわざ日本語を使用せず、韓国語のみを使用する程、自国語に対する愛着も当代最高だった。
彼が発刊した独立新聞が、ハングルで書かれているのも同じ脈絡であり、日帝時代当時でも、朝鮮語が使用出来るようになった背景には、彼の努力が存在している。
朝鮮時代末期に、朝鮮の利権を獲得する為、諸国が角逐(かくちく)を繰り広げたところ、従来の覇権国だった清、その次に凍らない港を得て、太平洋での覇権を得ようとしていたロシア、その次が日本だった。
李完用(イ・ワンヨン)は、他人の国で強国たちが、自らが覇権国であることを強調する行為を非常に軽蔑した。 そのような屈辱感が発動し、日清戦争直後に撤去された迎恩門(ヨンウン)門の場所に独立門を立て、朝鮮の自主独立を明らかにしながら独立協会を設立し、朝鮮の自主独立活動を活発に展開した。
この時の独立協会は、日本に対する独立ではなく、朝鮮はそのいかなる国家の植民地国でもないということを意味するものだ。 つまり、自主独立国の意志を示したものである。 この当時、李完用(イ・ワンヨン)は、独立組織の活動に向けて、加算を全部消尽したと言われている。
しかし、その独立協会の意味がとんでもない方向に変わった。 君主に対する忠誠心に一度も逆らったことがない程、高宗に対する忠誠心が篤かった彼は、閔妃(ミンビ)殺害事件を契機に触発された万民共同会で、ためらわずにあふれ出る "王政不満"について、深刻に当惑したことで知られている。
君主を中心に自主近代国家に進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た李完用(イ・ワンヨン)は、独立協会の性格が、反政府組織に発展することになるのに対し、深刻に憂慮するようになり、高宗(コジョン)も万民共同会で反政府的な主張が出て出たのを見て、これらの実体について疑った。
結局、高宗(コジョン)は、独立協会が朝鮮の自主独立よりは、自分の王権を廃位させる為の組織として活動しているものと判断、独立協会の首長を検挙し、独立協会を解散した。 高宗(コジョン)によって解散された独立協会の首長である李完用(イ・ワンヨン)は、全羅北道の観察使として左遷され、地方へ都落ちすることになり、この時李完用(イ・ワンヨン)は、二度と官職に就かないと決心した。 これ以上、何の希望もないということを確認するに至ったのだ。
李完用(イ・ワンヨン)に対して親米派、親露派、親日派として活動したと言うが、彼は自分個人の為に相手に変えながら、売国行為をしたことはない。
李完用(イ・ワンヨン)が、親ロシア派として活動した理由は、当時の日本中心の開化派たちによっり、閔妃(ミンビ)が殺害される事件が発生したからだ。 開化派たちが王政崩壊を企み、高宗まで殺害しかねないという危機意識を持つようになった李完用(イ・ワンヨン)は、宮殿に君主が居住することは危険だと判断、ロシア公使館に君主を避難させた。 その当時、高宗(コジョン)が無事だったのも、李完用(イ・ワンヨン)の努力があったからだった。
李完用(イ・ワンヨン)は、いつも自分自身が成そうとしていた朝鮮の自主近代化の標本モデルに名指した理想郷的な国家は、米国だった。 李完用(イ・ワンヨン)は、この心は一度も変えたことがなかった。 米国式の近代化を仰ぎつつも、君主に侍り、近代化を成功させた日本が、李完用(イ・ワンヨン)にとって見ると、最も完璧なロールモデルだっただけだった。
もし彼が真の親露派だったなら、ロシアで彼を殺そうとした理由もなかったはずだ。 ロシアは高宗に、ロシア軍事組織を朝鮮に派兵することを承諾して欲しいと要請を行うようになるが、この要求を拒絶したのが正に李完用(イ・ワンヨン)だ。
李完用(イ・ワンヨン)は、ロシアが経済援助は一度もしてくれず、軍事覇権を強化させる為の行為だけだと判断、彼らの真正性を疑っており、そういうロシアが後日、釜山の影島(ヨンド)を賃貸して欲しいという要請をした時にも、一旦手に渡ったその土地は、二度とこの国の土地にはならないと高宗に説得し、ロシアの影島(ヨンド)租借権要求も拒絶した。
ロシアとしては、朝鮮を支配出来る機会が李完用(イ・ワンヨン)によって遮断されたので、彼を殺そうとするしかなかった。
日本に対する親日行為が奸悪だったというが、むしろ日本はそのような李完用(イ・ワンヨン)に真正性が無く、他の目的があると判断したことで知られている。
それで李完用(イ・ワンヨン)を特別監査対象に名指し、彼が死ぬ直前までも彼の行動を尾行し、一挙手一投足を監視したりもした。 これは私たちがよく知らない事実だ。 最高の親日派が、日本政府の監視対象だったなんて。 なぜそうなのかについて、考えて見る必要があるだろう。
私たちが教科書、公共媒体などを通じ、見て知って来た李完用(イ・ワンヨン)の姿と、実際の李完用(イ・ワンヨン)は、姿は180度違う姿だ。 李完用(イ・ワンヨン)は、廃国の王であった高宗(コジョン)が、国が滅びた後も彼を第一の忠臣と考え、彼が李在明(イ・ジェミョン)によって襲撃を受けた時にも近侍を送り、彼の消息に関心を寄せた。
寝て起きた時と寝る前にも、いつも君主が居住する王宮に向かってお辞儀をした人。 その人が本当に単なる売国奴なのか、もう一度考えてみる問題だ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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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을 다시 한번 알아보자 정말 단순한 매국노였다? 


우린 이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으로 오로지 이완용만을 지목하고있다. 물론 이완용도 역사적 큰 죄인만은 분명하다.
나라를 상납후 일본이 자기에게 대우해 줄 지위에 관심만 많았던 더 나쁜 고종도 지목하기 전 !
조선은 군도 없었거니와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상납하며 스스로의 반성도 전혀 없이 이완용 한사람만을 우린 죽일놈으로 치부하면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듯 ~
마치 이완용을 격하게 욕하면 할 수록 그들은 민족투사가 되는듯 보이는 것이 나만일까 ?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 후기의 최고의 충신인 조선을 미국식으로 근대화하려는 개화가이다. 또 청나라의 속국이던 조선의 독립을 일선 현장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하고 온 우국 지사이다.
고종에 대한 충성심을 한번도 배반한 것이 없어 일본어도 영어도 모두 구사했지만, 일본과 협의를 할 때에도 통역을 두고 일부러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만을 사용할 정도로 자국어에 대한 애착도 당대 최고였다.
그가 발간한 독립 신문이 한글로 적힌 것도 같은 맥락이며 일제 시대에서도 조선어가 사용 가능하도록 된 배경에는 그의 노력이 존재하고 있다.
조선 시대 말기에 조선의 이권을 획득하기 때문에 국가들이 각축(카크치크)을 벌인 곳 기존의 패권국이었던 청나라, 그 다음에 얼지 않는 항구를 얻어 태평양에서의 패권을 챙기고 있던 러시아, 그 다음이 일본이었다.
이완용은 남의 나라에서 강대국들이 스스로 패권 국가임을 강조하는 행위를 매우 경멸했다. 그런 굴욕감이 발동하고 청일 전쟁 직후에 철거된 영은문(영웅)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조선의 자주 독립을 밝히며 독립 협회를 설립하고 조선의 자주 독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때 독립 협회는 일본에 대한 독립이 아니라 조선은 그 어떤 국가의 식민국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자주 독립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 당시 이완용은 독립 조직 활동을 위하고, 가산을 모두 소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독립 협회의 의미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군주에 대한 충성심에 한번도 거스른 것이 없을 정도로 고종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웠다. 그는 민비(밍비)살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만민 공동회에서 거침없이 쏟아져"왕정 불만"에 대해서 심각하게 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주를 중심으로 자주 근대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이완용은 독립 협회의 성격이 반정부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면서 고종도 만민 공동회에서 반정부적 주장이 나오고 나온 것을 보고이들의 실체에 대해서 의심했다.
결국 고종은 독립 협회가 조선의 자주 독립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폐위시키기 위한 조직으로서 활동하는 것으로 판단, 독립 협회장을 검거하고 독립 협회를 해산했다. 고종에 의해서 해산된 독립 협회의 수장인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면서 지방으로 낙향하게 된다 이때 이완용은 다시 관직에 오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완용에 대해서 친미 성향, 친러파, 친일파로 활동했다고 말하지만 그는 개인 때문에 상대로 바꾸면서 매국 행위를 한 적은 없다.
이완용이 친러파로 활동한 이유는 당시의 일본 중심의 개화파들에 의해서 민비(밍비)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개화파들이 왕정 붕괴를 획책하고 고종까지 살해할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된 이완용은 궁궐에 군주가 거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 러시아 공사관에 군주를 대피시켰다. 그 당시 고종이 무사했던 것도, 이완용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늘 자신이 이루던 조선의 자주 근대화의 표본 모델로 지목한 이상향적인 국가는 미국이었다. 이완용은 이 마음은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미국식 근대화를 바라면서도 군주로 섬기며, 근대화를 성공시킨 일본이 이완용에게 보면 가장 완벽한 롤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진정한 친러파이었다면, 러시아에서 그를 죽이려 했던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군사 조직을 조선에 파병하는 것을 승낙하고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지만 이 요구를 거절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러시아가 경제 원조는 한번도 하지 않아 군사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위 뿐이라고 판단,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했고, 그런 러시아가 훗날 부산 영도를 임대하라는 요청을 했을 때에도 일단 손에 건네진 그 땅은 두번 다시 이 나라 땅에는 안 된다고 고종을 설득하고 러시아의 영도 조차권 요구도 거부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가 이완용에 의해서 차단되었으므로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대한 친일 행적이 간악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그런 이완용에 진정성이 없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이완용을 특별 감사 대상에 지목,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그의 행동을 미행하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최고의 친일파가 일본 정부의 감시 대상이었다니. 왜 그런지에 대해서 따지고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교과서, 공공 매체 등을 통해서 보고 알아 온 이완용의 모습과 실제 이완용은 모습은 180도 다른 모습이다. 이완용은 폐 나라의 왕이었던 고종이 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를 첫번째 충신과 생각, 그가 이재명의 습격을 받을 때도 근시를 보내며 그의 소식에 관심을 보였다.
자고 일어났을 때와 자기 전에도 항상 군주가 거주하는 왕궁을 향하여 절을 한 사람. 그 사람이 정말 단순한 매국노인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료제공 : 일본 토쿄 박정석 선생제공

유시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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