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포로수용소

거제포로수용소




지금 초등중학교에서는 6.25전쟁(한국전쟁)이 왜 반발되었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학교에서 가르켜 주지 않고있다. 특히나 지금처럼 친북성향의 정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우리민족의 아픔, 6.25 전쟁은 잊어서는 안 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될 우리의 슬픈 역사이다. 그 흔적이 담긴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들여다본다.









거제도포로수용소(Koje POW Camp)는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0년 11월에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된 포로수용소이다.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면서도,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어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고, 섬이라는 지리적여건과 바다로 둘러싸여있어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을 위한 식량 재배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 설립 전에 고려되었다. 포로수용소 설립 초기에는 수용소 내에 5만 명 정도의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후에는 북한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여성 포로 300명을 포함한 약 17만 여명의 포로들까지 수용하게 되면서 그 당시 거제포로수용소는 1.190ha의 넓이에 거의 40만명의 포로수용이 가능한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최대규모의 단일 수용소였다.  그런 거제포로수용소가 사라지지 않고 당시의 역사와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공원으로 재조성되었으며 어느덧,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거제시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한번쯤 꼭 들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에 걸맞게 다양한 관람실과 조형물 등이 안에 자리잡고 있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시설과 규모
1950년 11월 27일부터 유엔군에 의해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 수양동, 장평동, 연초면, 남부면 일대에 총면적 12 km2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개시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수용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부상병 포로의 교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


포로들의 석방과 송환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19일 이곳을 제외한 여덟 곳의 포로수용소에서 35,000명 가량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이곳에 있던 친공포로들은 북으로 송환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 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폭동 사건 (거제도포로폭등사건)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하지만 포로들은 국군보다 좋은 대접을 받고있어 수용소에 와서 살이 올랐다고 했을정도..)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다.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주요 시설.
탱크 전시관
대형 디오라마관
6.25 역사관
포로대립관
포로폭동관
64야전병원
흥남철수 작전 기념비
잔존 유적
체험 및 놀이터
막사
취사장
포로귀환열차


거제도포로폭동사건 :

(6·25전쟁중이던 1952년 공산군 포로를 집단수용하고 있던 거제도에서 발생한 포로들의 폭동사건).

당시 거제도에는 약 13만 2,000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들은 북한과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공산포로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이 대립·분열된 이유는 국제연합(UN)군측이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 북한, 중국, 또는 타이완을 선택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유송환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공산군측은 모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의 고국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UN군측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부 포로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 포기를 권유했다는 이유로 공산측 포로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돌은 1952년 2월 18일에 있었다. 공산측 포로들의 저항이 더 강력했던 제62수용소에서 포로들이 미군의 강압적인 심사를 거부하자 미군이 발포하여 포로측에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으며, 미군측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3월 13일 한국군경비대와 포로들이 충돌하여 포로 12명이 죽고 26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5월 7일 수용소 소장인 F.T.도드 준장이 제76포로수용소에 납치·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얼마 후 도드 준장은 미국의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포로수용소장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사를 받았다. 6월 13일에도 제76수용소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포로측 38명이 살해되고 195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측 1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10월 1일에는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중국군 56명이 살해되고 1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2월 4일에는 봉암도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포로 87명이 사망하고 115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폭동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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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