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명봉사에는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장조)의 태실이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봉 정상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걸쳐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천 명봉사에는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장조)의 태실이 있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태봉 정상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걸쳐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태실에 있던 태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지금의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명봉사에 있는 두 태실은 석물만 남아 있는 태실지로, 사실상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태실을 보기 위해서는 고양 서삼릉을 찾아야 한다.


문종은 조선의 5대 왕으로 세종대왕의 맏아들로 30년을 세자로 지내다, 왕이 되고 나서는 2년 만에 병사 하였다. 단종이 문종의 아들이다.

문종의 태실은 소백산 깊은 명봉사의 무량수전 뒤 봉우리에 있다, 낡은 석재는 모두 새 걸로 갈아 끼워져 있지만 일부 온전한 것은 그대로 사용하여 세월의 무언을 알 수는 없지만 귀부와 비머리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정조 8년 9월 15일 정묘 1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예조에서 열성조의 태봉을 써서 바치다.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에 문종 태실 위치가 기술되어 있다.




사도세자 태실은 문종 태실 뒤편에 있으며, 난간 둘레석의 연엽주석, 동자석, 횡죽석, 우전석, 중동석, 가첨석 등 대부분이 문종 태실과 함께 2016년 복원되었다.

장조는 사도제자의 사후 추존된 칭호다. 당쟁 속에 불운하게 살다가 뒤주에 갇혀 죽은 그에게 영조가 시호 사도를 내렸고, 1776년 왕위에 오른 아들 정조는 아버지의 시호를 장헌으로 높였다. 1899년 고종은 장헌을 장조로 추존했다. 문화재청은 왕실을 그린 태봉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태실과 주변 풍경을 그린 장조 태봉도(莊祖 胎封圖)를 역사성과 희소성이 높고, 제작 동기와 시기가 분명하며 태실 관련 왕실 회화로 역사적·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장조 태봉도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2022년 8월에 지정했다. 그림 속 태실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에워싼 타원형 구도 안에 자리 잡았다. 멀리 상단에는 뾰족한 원각봉(圓覺峯)을 그리고, 가운데에는 명봉사(鳴鳳寺)와 문종태실(文宗胎室)을 배치했다. 그 위로 사도세자의 태실인 경모궁 태실(景慕宮 胎室)을 그렸다. 그림 속 태실은 이중으로 된 연꽃지붕이 있는 개첨석에 팔각의 난간석을 두르고, 앞쪽에 거북 받침에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좌우 사방으로 활짝 펼친 듯한 구도에 주요 장소에 지명(地名)을 써 놓은 방식과 줄지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산들, 짙은 먹으로 거칠게 표현한 봉우리 등 지도식 표현이 두드러진다.


                                                                장조 태봉도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
명봉사 일주문을 지나 총총 들어가다 보면 왼쪽 옆에 안내문이 박힌 돌덩이가 보인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돌덩이다.


명봉사(鳴鳳寺)는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의 소백산 자락의 울창한 숲과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아 고요한 느낌을 준다. 명봉사는 예전에는 큰 건물에 승려도 다수 기거하는 대형 사찰이었다고 하나, 한국 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지금은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다. 이 봄에 가볼 만한 역사적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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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