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선승(禪僧), 서암(西庵)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10대 총무원장과 8대 종정을 지냈다.

서암(西庵) 스님

출가한 후 참선에만 몰두해 조계종단 내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추앙받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 8대 종정을 지냈다.

속성은 송(宋), 이름은 홍근(鴻根)이며, 서암은 법호(法號)이다.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1917년 경상북도 안동 녹전면에서 3남으로 출생하였다.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과 신문학을 배우고, 1932년 예천 서악사(西嶽寺)에 출가해 1935년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화산(華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낙순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어 1937년 역시 김룡사에서 금오(金烏) 선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대덕법계(大德法戒)를 품수(稟受) 하였다. 1938년에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종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40년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3학년을 마치고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대창학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고, 1942년에 김룡사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고, 이듬해 봄부터 1년 동안 철원 심원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1944년 여름에는 금강산의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정진하여 병마를 물리쳤으며, 이해 가을 묘향산과 백두산을 거쳐 문경 대승사의 바위굴에서 승려 성철(性徹)과 함께 정진했다.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 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 西庵(서암) 스님 -


“많이 아는 것은 貴(귀)한 것이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다 털어 버리는 것이다.
많이 갖는 것은 富(부)한 것이나, 그보다 더 부한 것은 하나도 갖지 않는 것이다.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있는 것이나, 그보다 더 큰 용기는 남에게 져주는 것이다.
가득찬 그릇에는 넘쳐 버리지만, 비어있는 그릇에는 담아지리라.
넘쳐 버리는 곳에는 착오가 있으나, 비어있는 곳에는 정확함이 있는 것이다”     

- 西庵(서암) 스님-


1943년 철원 심원사(深源寺)에서 1년간 《화엄경》을 강의하고, 이듬해 문경 대승사(大乘寺) 바위굴에서 성철(性徹)·청담(靑潭:이순호) 스님과 함께 용맹정진한 후, 광복이 된 1945년에는 예천포교당에서 불교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6년 계룡산 나한굴에서 '나고 죽는 것은 본래 없다. 라는 본무생사(本無生死)를 깨달으니, 30세 때다.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물으면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만공(滿空)의 회상인 정혜사와 한암(漢岩)의 회상인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했다. 32세 되던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지리산 칠불암,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 등지에서 승려 금오를 모시고 결사 정진했다.



1952년 이후에는 주로 문경 청화산(靑華山) 원적사(圓寂寺)에 주석하면서 1969년까지 계룡산 정진굴, 청화산 원적사, 속리산 중사자암(中獅子庵), 부산 범어사(梵魚寺) 금오선원, 태백산 각화사(覺華寺),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등 전국각지를 오가며 한거(閑居)와 정진을 거듭하였다. 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 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62세 때인 1978년 이후로는 봉암사 조실이 되어 승풍을 바로 잡고 가람을 중창했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산문(山門)을 통제하여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제정하였다.

1991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한 뒤, 1993년 제8대 종정이 되었다. 이듬해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사임한 뒤에는 거제도·삼천포·팔공산을 거쳐 태백산에 무위정사(無爲精舍)라는 가건물을 짓고 무위자적하다 2001년 봉암사 염화실(拈花室)로 돌아와 안거하던 중 2003년 3월 29일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세수 87세, 법랍 72세였다.

조계종단 내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꼽히며, 출가한 후 참선에만 몰두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이 열반송을 묻자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스님은 평소 ‘우행호시(生 行虎視)'를 강조하셨는데. 우행호시의 삶은, 걸음은 소걸음처럼 신중하게, 정신은 호랑이 눈빛처럼 번득이게' 牛行은 실천을 의미하고 虎視는 깨어있음을 의미하며,  항상 깨어있는 문수보살의 밝은 지혜와 같이 지혜를 실천하는 보현보살의 자비행과 같이 如鳥翼새의 양날개와 같다고 할수 있다.



“파도(波濤) 타기”

“우리의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나 사랑하는 생각이나 미워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그 정체가 어떠한 것일까요?

나무 기둥은 뿌리를 박고 나지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돌이켜 보면 그 자리가 '공(空)하다'는 겁니다. 다만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자취 없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생각에 무슨 결정적인 정체가 있어서 기쁜 생각의 싹이 터 올라오고, 슬픈 생각의 싹이 터 올라오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근거없는 마음 때문에 온갖 갈등과 불행이 벌어지니 이것이 문제지요. 그런 온갖 갈등도 사실, 지나고 난 뒤에 보면 그 정체 없음을 알 수 있거든요. 그렇게 정체 없는 마음에 우리가 속은 것이지요. 일어난 생각에 무슨 실재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스스로 노심초사하고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중생 세계입니다.

이것을 일러 불교에서는 '생멸법(生滅法)'이라고 합니다.
파도는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 바탕인 물은 고요합니다. 그러나 물도 물이요, 파도도 물입니다. 중생은 파도에 휩쓸려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물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이리저리 떠밀려서 살아갑니다. 생멸하는 파도에 어떤 실재성을 두지 않고 그 본질인 물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구름만 걷히면 맑은 하늘이듯이, 우리의 잘못된 착각만 떼어버리면 그대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본래의 부처입니다. 흘러가는 생각의 뿌리를 돌이켜보아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하는 불성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다운 즐거움이 있습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도타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지옥을 가든지 천당을 가든지 온갖 것에 물들지 않는 해탈의 세계가 됩니다. 성내도 내가 성내고, 웃어도 내가 웃고, 울어도 내가 웁니다.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는 것입니다.”   - 西庵(서암)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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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