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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함께쓰는역사 - 일본군‘위안부’ 4

그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학순 이전의 피해자들

함께쓰는역사 - 일본군‘위안부’ 4

그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학순 이전의 피해자들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며 세계 평화와 인권 회복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함께하며 자료를 찾고 언어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도 이어가고자 한다.

 

<소식 없는 귀환>

『대구시보』 1946년 3월 19일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있다. “중국 각지의 이 재 동포 6천 명을 인솔하고 지난 10일 부산 등을 거쳐 귀향한 상해한국교민피난민 수용소장 오룡비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독신 부녀가 300명이나 되고… 과거에 가난한 살림살이에 희생이 되어 멀리 대륙까지 끌려간 소위 위안부가 대다수이며 그리운 고국을 찾아왔으나 반갑게 맞아주는 연고자도 없는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이는 전쟁 당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끌려갔던 약 300명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해방 후 상하이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알린 거의 유일한 기사이다.

 

윤정옥(1925년생) 전 교수는 ‘끌려갔던 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피해 실태 조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매일같이 귀환자 소식을 전하던 해방 공간의 신문 틈에서 ‘위안부’가 돌아왔다는 기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 어떻게 됐을까. 1946년 3월 부산에 도착한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공개 증언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일까.

 

<‘위안부’를 본 사람들>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는 일본 국회 도서관이 소장한 일본의 전쟁 체험기· 부대사(部隊史)를 대상으로 1990년대부터 ‘위안부’ 관련 기록을 조사하여 1,000권이 넘는 기록물을 발굴했다.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사회적 주제로 본격화되기 전에 작성된 1950~1980년대 기록물도 208권이나 됐다. 그 기록물 속의 일본군들은 속아서 전쟁터에 끌려온 ‘위안부’를 동정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위안소 이용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위안부’와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글도 있다.

 

연합군도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남은 ‘위안부’를 보았다. 여성을 속이고 성적으로 이용한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는 사악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일전(對日戰)에 활용 가치가 없는 이들에게는 무관심했다. 이는 도쿄, 인도네시아, 괌 등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아시아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은 사건에 대해서는 전쟁 범죄로서 처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쟁 지역에 머물렀던 조선인들도 ‘위안부’를 보았다고 회고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이었던 정정화는 중국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이 보호 중이던 ‘위안부’ 30여 명을 봤다고 했다. 타이완에 군인·군속으로 끌려갔다 종전을 맞은 조선인들도 현지에 남은 ‘위안부’ 200명가량을 구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 이 여성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이나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조직을 이루어 목소리를 높여왔으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리하지 못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 나하에서 미군에게 발견된 조선인'위안부'들

 

1945년 5월 오키나와 자마미섬 포로수용소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위안부'들

 

그 후 사진 속 여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학순 이전에도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김학순은 전쟁 및 식민지 범죄로 서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당사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피해 경험을 이야기한 피해자는 김학순 이전에도 있었다.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의 이야기가 1975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꽤 떠들썩했지만 한국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윤정옥 전 교수가 배봉기를 만나고 1981년 8월 29일자 『한국일보』에 그 이야기를 썼지만 반응이 크지는 않았다. 1984년에는 태국에 살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인 노수복의 이야기가 드러났다. 1942년에 부산에서 싱가포르, 태국 등지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노수복은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에 올 날을 손꼽았지만, 막상 귀환 날짜가 정해지자 부모님을 볼 낯이 없어 수용소를 탈출했다. 중국계 태국인과 결혼한 노수복은 KBS ‘이산가족찾기’를 통해 동생들을 찾았고, ‘위안부’로 끌려갔기 때문에 가족과 헤어졌다는 사연이 드러났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서 멈췄다. 어디에선가 이산된 존재로 있을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대 정치·학술·사회 영역에서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했을 때 여성 잡지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실었다. 『레이디경향』 1982년 9월 호에는 전남 승주 출신의 ‘위안부’ 피해자 이남님(당시 55세)의 ‘독점 수기’가 실렸다. 이남님은 1945년 2월 마을 친구 순단이와 함께 ‘위안부’로 끌려갔다. 버마 랑군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카타에서 연합군에 억류됐다. 1946년 7월 중순 ‘몽매 간에도 그리워하던 내 땅’에 도착했지만 갈 곳은 없었다. 그 수기는 식당 주인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술집을 전전하다 청주에서 대폿집을 차린 것으로 끝이 난다. 『여성중앙』 1984년 4월호에 실린 배옥수 또한 1944년 7월에 버마로 끌려간 피해자다. 버마 아라칸에 주둔한 일본군 막사 근처 가건물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일본 패전 후에는 태국 방콕,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베트남 사이공으로 갔다. 수용소에서 만난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의 학대로 이혼하고, 다시 베트남계 캄보디아인과 재혼을 했다. 1975년 ‘월 남 패망’을 앞두고 한국 교민들과 함께 귀국했지만 ‘베트남인의 아내’ 신분이던 배옥수는 ‘한국인의 베트남 아내’에게 주어지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빈곤에 허덕였다. 서울의 여관방에 머물고 있던 배옥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악상을 다시는 재현되어서는 안 될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라며 말을 끝맺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역사화하기 위해>

피해자가 이야기를 해도 증거가 도처에 있어도, 제대로 질문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1980년대까지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재현된 ‘위안부’의 모습은 성 착취 장면을 클로즈업한 선정적인 것뿐이었다. 김학순 이후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2020년 현재 ‘위안부’ 피해를 왜곡하는 역사 부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우리가 여전히 피해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역사를 만드는 질문은 인권과 평화의 미래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권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의 일상이 존중받을 권리라면, 평화는 그러한 일상들의 균형 상태이다. 우리는 일본군 성노예 제도의 역사로부터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질문 하며 제대로 답을 찾아가고 있는가. 피해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중부태평양 축섬(1946년 1월)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 박정애, 동북아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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