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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함께쓰는역사 - 일본군‘위안부’ 3

하복향과 카후코(可浮子)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리핀 피해자 이야기

하복향과 카후코(可浮子)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리핀 피해자 이야기

 

【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며 세계 평화와 인권 회복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함께하며 자료를 찾고 언어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도 이어가고자 한다.】

 

 

“열여섯 살 먹어 나가서 열아홉에 해방이 됐소. 띠는 범띠, 생일은 음력 삼월 열이레 날.”

“딸네들은 공부를 안 시켰어. 그래가 공부도 몬 했어”

“아부지가 소개인한테 속아가지고 좋은 데 공장 간다고 나를 보냈는 기라. 내가 갔다 와갖고 얘기해 논 께네 부모가 안 기라. 우리 엄마는 영감한테 악을 품고 막 이라대요. 자슥 팔아묵고……”

“대만 신주쿠新竹, 신주라 카는 데 1년 있다가 일본놈들이 후리삥필리핀이라 카는 나라 치고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갔단 말이오. 일본인 부부 주인과 여자들 사십 명이 갔어요.”

“마니라마닐라 시내. 군인들로 접대했다 아이오 전부”

“그 예 마 몸을 내가 바친 께네 안 좋더라 말이오. 내가 병이걸린 께네 더 안 좋더란 말이오. 그래 제일 힘들더라고.”

“인자는 나이가 많으니께네 마 숨길 필요가 없고 쏙일 게 없다 싶어서 내가 할 말 다 하는기라. 우째든지 날 좀 살려주소.”

◆ 2001년, 하복향이 이야기하다

 

 

2001년 2월 1일. 한국정신대연구소 고혜정 연구원이 찾아갔을 때 하복향은 아직도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본인이 직접 피해 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 하복향이 다니는 병원의 의사가 연구소로 전화를 해 부산 자갈치시장에 피해자가 있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하복향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봇물이 터진 듯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이야기들을 했다. 이날 고혜정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지며 더욱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은 오지 않았다. 불과 열흘 뒤에 하복향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고혜정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 5집에 단 한 번의 면담 내용을 풀어 하복향의 이야기를 실었다.

 

◆ 1945년, 필리핀 포로심문카드의 카후코(可浮子)

제2차 세계대전기 필리핀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치른 미군은 현지에서 포획·발견한 적군이나 민간인 포로를 심문하고 신상정보카드를 만들었다. 이 중에는 얼굴의 정면과 측면 사진이 부착되어 있고 열 손가락 지장이 찍힌 카후코(可浮子, Ka, Fuko)라는 조선인 여성이 있다. 포로 번호 51J-20946I, 1925년 3월 17일생으로 원 주소는 경북 예천이다.

 

그는 9월 14일 필리핀 루손에서 미군에 발견되어 10월 3일 루손 제1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민간인 억류자 150여 명과 함께 귀환선 J.N.E 60호를 타고 10월 12일 일본을 향해 떠났다. 카후코의 포로 번호는 미군이 작성한 귀환자 승선 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카후코로 기록된 하복향의 포로심문카드(1945.10.)  소장: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2017년, 하복향과 카후코:

둘로 갈라졌으나 원래는 하나였던

이 심문카드 속의 카후코는 바로 하복향이다. 2017년 서울대학교 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이 카드를 찾아 고해상도 스캔을 받았다. 당시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나는 40여 개의 카드를 살펴보다 카후코에서 시선을 멈췄다. 카드 속 카후코의 얼굴이 증언 5집에 흐릿하게 실린 하복향의 얼굴과 겹쳐 보여서였다.

 

1993년 10월 일본 후생성이 필리핀 포로심문카드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전체 164,395명 중 조선 출신 여성은 19명으로 ‘위안부(Comfort girl)’로 기재된 자가 10명, ‘위안대(Comfort Unit)’가 1명, 그 외가 8명이라고 했다. 이 자료는 국가기록원이 일본 정부로부터 전달받아 소장 중이나 ‘위안부’ 및 ‘위안대’ 11명의 이름과 원 주소 등이 개인정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먹칠 되어 있어 자료로서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한편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를 꾸준히 조사해온 재미 역사학자 방선주 박사는 1996년에 30여 개의 포로심문카드 복사본을 한국정신대연구소에 기증했다. 일본의 조사자 수보다 많았고, 겹치는 인물도 거의 없었다. 연구소는 이 기록의 원 주소지를 근거로 김소란(Sonoda Soran, 가명)을 찾아 구술을 청취하고 그 내용을 증언 3집(1999년)에 실었다. 이를 계기로 김소란은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

 

나는 2017년에 하복향의 증언을 읽다가 그 내용이 김소란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미군의 폭격, 일본군과 함께 휩쓸린 피난, 살기 위한 탈출, 헤매다가 맞닥뜨린 미군의 사격 위협, ‘코리아’를 외치다 구조되고 수용소로 이송되는 과정이 매우 흡사했다. 방선주 박사가 보내온 복사본에도 카후코의 카드가 있었으나 얼굴과 지문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상태가 열악하여 식별이 어려웠다. 그러나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이 다시 찾아온 이미지 속에서 카후코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하복향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직감만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다. 과학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경찰청에 카후코의 심문카드 속 지문과 하복향의 실제 지문 일치 여부를 의뢰했고, 곧 두 가지가 일치한다는 응답이 왔다.

 

 

◆ 귀 기울임,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정부가 지문 날인을 시작한 1968년 이전에 하복향이 작고했다면 카후코가 하복향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복향은 어쩌다 카후코가 됐을까. 하복향의 일본어 발음은 카후쿠코(河福香·Ka, HukuKou)로, 필리핀 수용소에서 심문 당시 하복향이 스스로 말한 이름이 기록자의 손을 통해 카후코(可浮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나고 자란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기 이름을 어떻게 기재했는지 직접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1925년생으로 기재된 기록보다는 1926년생 범띠라는 하복향의 말이 더 신뢰할 만하다. 그는 일관되게 만 나이로 이야기했고, 그렇다면 열아홉에 해방이 됐다는 말이 정확한 것이 된다. 식민지 시기에 성장한 이들이 나이를 만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의적으로 연표를 만들곤 한다.

 

연구자가 역사를 기술하면서 그때그때의 직감에 따라 문헌 자료나 증언과 같은 사료를 선택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는 구술, 이미지, 문헌 등과 같은 조각난 자료가 놓여있고 그 사이에는 때로 모순처럼 보이는 수많은 간극이 있다. 그것을 메우려는 연구자, 후세대의 적극적인 귀 기울임, 그리고 모든 자료를 의미 있게 들여다보려는 열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 열정은 글을 읽고 쓰는 배움의 권리에서 박탈된 식민지 여성의 역사를 써 내려갈 때 더욱 필요하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열정으로 하늘에 있는 하복향이 위로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글과 사진의 바탕이 된 자료는 한국정신대연구소(200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 풀빛, 251-302쪽과 서울대학교 정진성 연구팀(2018),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푸른역사, 44-47쪽, 그리고 나의 조사 경험이다.  출처: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타 박정애 /동북아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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