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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허균은 조선시대 관인사회와 선비사회에서 많은 화제를 뿌린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허균은 많은 글을 남겼다. 시를 비롯해 논설 같은 글, 음식이나 농사에 관련된 저술도 남겼다. 더욱이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을 써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에 바람을 일으켰다. 이 소설로 허균은 국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긴 것이다.

허균은 조선시대 관인사회와 선비사회에서 많은 화제를 뿌린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럴 만한 사연을 알아보자.

 

그는 대대로 벼슬을 하고 문명(文名)을 떨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글을 익히면서 천재다운 자질을 인정받았고, 과거에 우수한 등급으로 합격하였다.  이런 배경을 지니고 있으니 그의 출세는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벼슬자리에 나아가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지방 수령이 되어서는 관아에 부처를 모시기도 하고, 부모 상을 당하고도 술을 마시거나 기생과 놀이를 하였다.  유교 윤리와 질서를 도통 지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리기보다 서자, 중인, 천인들과 어울려 함께 거리를 활보하고 시를 지으며 질탕한 놀이를 벌였다.  더욱이 이들을 불러다 관아에 살게 하거나 생활을 돌봐주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일은 그를 관인사회와 선비사회에서 이단아로 지목받게 했고,  늘 지탄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광해군의 인정을 받아 높은 벼슬자리를 얻게 되었으나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역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역적이 쓴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

 

허균은 많은 글을 남겼다.  시를 비롯해 논설 같은 글, 음식이나 농사에 관련된 저술도 남겼다.  더욱이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을 써서 조선 후기 서민문학에 바람을 일으켰다.  이 소설로 허균은 국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의 논설 중에는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 같은 글이 있다.  호민론은 민중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구분해 그 성향을 설파한 글이다.  항민은 아무 의식도 없이 지배자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원민은 지배세력의 수탈과 비리에 늘 불평불만을 지니고 있으나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며,  호민은 은밀한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행동으로 나서는 이들이다.  허균은 이들 민중이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라고 설파하면서,  지배자들은 이를 알고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유재론에서는 인재를 발굴할 때 서자나 천민을 가리지 말고 등용해야 하며,  당파를 중심으로 인물의 편을 갈라 벼슬자리를 준다면 관인사회가 유리된다고 설파하였다.  다시 말해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공평한 인사정책을 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잘못된 인사정책을 질타한 것이다.  서자 홍길동도 여기에 해당한다.

 

《도문대작》이라는 저술은 팔도의 음식을 소개한 책이다.  그가 낙백해 있을 때 가난으로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푸줏간 문을 지나면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을 담아 책명으로 삼았다.  유교를 공부한 학자들은 되지도 못한 성리학 이론을 늘어놓고 문집에 담았는데, 허균은 그런 글을 하나도 짓지 않고 음식 이야기를 쓴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점잖은 선비가 할 짓이 아니라고 꾸짖었으나, 이 저술은 오늘날 한국 식품사의 기본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인용한 허균의 시

 

허균의 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가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과 유명 시를 독파하여 이를 시와 글에 깔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부한 시어를 구사하고 다양한 주제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서정시보다 의미를 담아 주제를 제시하는 시를 썼는데, 그래서 그를 문장가보다 시인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조선 후기 정조도 그의 시문을 애독하였고 중국에도 그의 시가 널리 알려졌다.  지난 해 시진핑 중국 주석이 한국에 와서 한·중 우호를 강조하며 "간담을 서로 비춘다"는 허균의 시 구절을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시인으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벼슬아치로 호남 일대를 다니면서 부안을 드나들고, 유배 생활 당시 부안 언저리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안 기생 이매창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매창과 시를 주고받으며 플라토닉 러브를 하였다.  이 일화는 전국으로 퍼져 여류시단의 역사에 올랐으니, 시인으로서 허균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진보적 사상가로서 허균의 면모는 중국의 사상 곧 법가(法家), 형가(刑家) 등 여러 사상과 주자학에 반기를 든 양명학을 탐구한 것이다.  또 북경에 소개된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하기도 했으니,  달리 말하면 사상의 자유를 구가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오늘날 허균을 두고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앞서 말한 진보적 사상가를 비롯해 모순된 현실을 뜯어 고치려는 개혁가, 한문학사에 공헌한 시인, 언문소설로 대중을 일깨운 소설가 등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오늘날 서류에 이름을 쓰는 곳에 으레 홍길동을 예시한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 중에 홍길동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 열도에는 홍가이 전설이 있다.  오키나와의 예전 이름은 류쿠(琉球)다.  이 전설의 줄거리는 대륙에서 건너온 홍가이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홍길동전》에는 홍길동이 조선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먼 섬으로 들어가 율도국을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율도국을 오키나와 열도에 있는 한 섬으로 해석하고 있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정약용처럼 많은 저술을 통해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는 베트남을 통일한 호지명(胡志明)도 부정부패를 막는 방법을 찾고자 애독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균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글 /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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