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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호넨, 종합불교 탈피해 수행 쉬운 염불 선택 다른 佛法 배제해 兼修 차단…종파불교 필연
官僧교단 벗어나 재출가한 ‘둔세승’ 주류등장
에이존 등 민중구제 힘써…니치렌은 권력지향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지금 도쿄의 서남부에 있는 해안지역 가마쿠라(鎌倉)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賴朝)가 군사적 지배기구인 막부를 세웠던 1192년부터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멸망하기까지의 약 150년간을 말한다)에 새롭게 등장한 불교,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의 남도(南都, 나라)불교나 헤이안(平安, 794년 이후부터 가마쿠라 이전까지)시대에 이루어진 불교가 아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보편적인 불교 속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가마쿠라 시대에 이루어진 신불교는 일본적인 특수성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마쿠라 신불교가 오늘의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만의 특수성 강화…主流로 떠오르다
 
호넨, 종합불교 탈피해 수행 쉬운 염불 선택  다른 佛法 배제해 兼修 차단…종파불교 필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불교는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배출했는데,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사람은 단연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 1133~1212)스님이다. 스님은 15세에 천태종의 총본산 엔랴쿠지(延歷寺)가 있는 히에이잔(比叡山)으로 오른다. 구카이(空海, 774~835)의 진언종이 있었던 고야산(高野山)과 함께 헤이안 불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온 히에이잔은 종합불교인 천태종을 형성하고 있었다.
천태종은 중국의 지자(智者, 538~597)대사 당시부터 종합불교였지만, 일본에 와서는 그러한 특성을 더욱 깊이 해갔다.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쵸(最澄, 767~822)가 당으로부터 천태사상은 물론, 선, 진언(밀교), 계율까지를 아울러서 전해왔던 것이다. 이를 사종상승(四宗相乘)이라 한다. 후대에는 염불의 정토신앙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불교를 종합하 고자 하였다. 따라서 호넨을 비롯해서 많은 가마쿠라 신불교의 조사들이 이 히에이잔에서 불교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곧 종합불교를 먼저 배우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호넨스님의 제자로 일본 정토진종을 창종한 신란스님의 진영. 불교신문 자료사진


호넨은 대장경을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할 만큼 폭넓게 섭렵한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히에이잔을 떠난다. 히에이잔 하산은 종합불교의 탈피를 상징한다. 종합이 싫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뭔가 하나만을 선택하고, 그 선택된 하나만을 집중적으로 전수(專修)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호넨이 선택한 것은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이고, 그것만을 전적으로 닦으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를 전수염불(專修念佛)이라고 한다. 왜 염불을 선택했던 것일까? 가장 쉬운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이행(易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가마쿠라 신불교를 논할 때, 호넨을 먼저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호넨의 ‘이행→선택→전수’라고 하는 패러다임이 후대 거의 모든 가마쿠라 신불교의 조사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정토신앙을 행하였던 정토진종의 신란(親鸞, 1173~1262)이나 시종(時宗)의 잇펜(一遍, 1239~1289)은 물론, 임제종의 에이사이(榮西, 1141~ 1215)나 조동종의 도겐(道元, 1200~1253)은 선 하나만을 선택하고 전수했던 것이며, 니치렌(日蓮, 1222~1282)은 “남묘호렝게교(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제목의 봉창(唱題) 하나만을 선택해서 전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일본불교는 문제점을 안게된다. 바로 선택이 가져다주는 문제점이다.


호넨이 염불 하나만을 선택하였을 때, 다른 모든 불법은 배제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도대체 선, 화엄, 법화 등 배제되었던 많은 불교사상이나 수행법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사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배제되었던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종파불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일본 전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어디에선가 어떤 수행법이든지 어떤 종파에 의해서 선택되고 있으니까 문제없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염불이 참선을 도울 수 있으며 참선이 염불을 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회통적 겸수(兼修)가 차단되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각기 종파들은 자기종파 절대주의에 빠질 수도 있으며, 선택과 전수의 논리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가기 위해서 필요한 융합.퓨전을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 단조로운 관습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일본불교는 그러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국불교의 전통에 서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官僧교단 벗어나 재출가한 ‘둔세승’ 주류등장
에이존 등 민중구제 힘써…니치렌은 권력지향


우리의 경우에도 유사하리라 생각되지만, 우리보다 일본불교의 국가불교적 성격은 더욱 강했던 것 같다. 전래 초기에서부터 헤이안 불교에 이르기까지 주류가 된 것은 관승(官僧)이었다. 즉 공무원 신분을 갖고 있었던 스님들이 국가(천황가)의 안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소임이었다. 나라에서 매해 어느 종단의 승려 수를 제한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란 무엇일까? 그 생명이 자발성에 있는 것 아니던가. 어디 불법이 지배자를 위해서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나던가.


일본 교토에 위치한 지온인(知恩院)은 1175년 호넨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일본 정토종의 총본산이다.

사진제공=<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불법은 그것을 받아들인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니 말이다. 비록 나라의 허가가 없더라도 출가해서 생을 걸고 수도를 하고프게 만드는 것이 불법이며, ‘승니령’에 의해서 민간에의 포교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그 장벽 안에 갇힐 수 없게 하는 것이 불법 아니던가. 나라의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 출가를 감행했던 승려를 사도승이라 한다. 이들이 민간에서 불법(특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널리 펴고 고난에 처한 민중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벌이게 되자, 민중들에게는 ‘살아있는 부처님’의 왕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래, 그런 분들을 민중들은 ‘저자거리의 성인’이라는 뜻에서 ‘이찌 히지리’(市聖) 혹은 줄여서 ‘히지리’(聖)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원효스님과 같은 분들을 생각하면 된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이러한 히지리들이 한번도 불교사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하지만 일본불교사는 그렇지 않았다. 히지리들이 주류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가마쿠라 신불교였다. 앞서 이야기한 호넨의 히에이잔 하산(정토종 개종)과 같은 경우 역시 당시 관승교단이었던 천태종으로부터의 탈피였던 것이다. 이렇게 먼저 관승교단에 몸담았다가,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재출가(再出家)한 스님들을 둔세승(遁世僧)이라 한다.
가마쿠라 신불교는 바로 이러한 둔세승들에 의해서 성립된 불교였다. 호넨이 그렇고, 신란, 도겐, 니치렌 등 가마쿠라 신불교의 주요한 조사들이 모두 그렇다. 가마쿠라 신불교의 조사 중 후기에 등장하는 잇펜의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둔세승 교단’으로 출가한다. 이렇게 관승이냐 둔세승이냐 하는 관점은 곧 바로 국가권력과의 관계 맺기에 따른 분류이다. 우선, 국가권력 내지 세속과는 단연코 선을 긋고서 권력중심지(교토나 가마쿠라)로부터 멀리 떠나서 세간에의 방편적 적용을 거부한 채 고고한 순수불교를 건설한 것이 도겐이다. 이는 그의 어록을 정리한 제자 에죠(懷, 1198~1280)의 <정법안장수문기>(지성스님 옮김, 동대출판부)를 읽어보면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둔세의 방향이 굳이 초세 속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히지리의 전통이 그러했던 것처럼, ‘민중 속으로’의 방향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에이존(叡尊, 1201~1290)과 닌쇼(忍性, 1217~ 1303) 사제에 의한 율종과 잇펜의 시종(정토불교의 한 종파) 교단의 활동들이다. 우리는 율종이라고 하면, 계율의 연구와 준수라고 하는 점만이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에이존과 닌쇼 사제의 율종(진언율종)은 민중에의 구제에도 힘을 썼다.
특히 닌쇼는 나라에 있을 때부터 한센병 환자 구제활동에 힘썼으니, 지금도 나라의 한냐지(般若寺)나 가마쿠라의 고쿠라쿠지(極樂寺)에는 당시의 구제시설을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의 마더 테레사’라고 존숭되고 있는 것이다. 잇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전국을 유랑걸식하면서 춤염불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항상 많은 수의 한센병 환자를 비롯한 비인(非人, 천민)들을 데리고 다녔다 한다. 그 모습은 그의 전기인 <잇펜히지리에(一遍聖繪)> 속에 그림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집단의 모습이 얼마나 미천하게 보였으면, 당시의 가마쿠라에는 출입을 저지당하기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닌쇼의 율종교단은 당시 막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잇펜의 시중(時衆, 시종의 무리)들과 다소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특히 잇펜에게서 원효스님의 얼굴을 본다. 마지막으로 니치렌은 또 다르다. 끊임없이 막부를 향하여 자신의 불교에 귀의하라고 외쳤다. 얼핏 보면 권력에 반기를 든 것 같으나, 실제로는 권력 지향적이었다.
권력의 힘으로 <법화경>을 널리 홍포하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국가권력에의 비판 역시 권력의 이용을 위해서였다. 그런 한에서 탄압마저 서슴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탄압마저 불사하는 데에서 니치렌 불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 열정의 뜨거움을 보여주지만, 종교가 국가권력과 유착할 때 어떻게 위험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바로 니치렌주의자의 일부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었던 현대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마쿠라 신불교의 모습을 살피면서 우리 불교는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김 호 성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지금 도쿄의 서남부에 있는 해안지역 가마쿠라(鎌倉)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賴朝)가 군사적 지배기구인 막부를 세웠던 1192년부터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멸망하기까지의 약 150년간을 말한다)에 새롭게 등장한 불교,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의 남도(南都, 나라)불교나 헤이안(平安, 794년 이후부터 가마쿠라 이전까지)시대에 이루어진 불교가 아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보편적인 불교 속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가마쿠라 시대에 이루어진 신불교는 일본적인 특수성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마쿠라 신불교가 오늘의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만의 특수성 강화…主流로 떠오르다 호넨, 종합불교 탈피해 수행 쉬운 염불 선택 다른 佛法 배제해 兼修 차단…종파불교 필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불교는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배출했는데,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사람은 단연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 1133~1212)스님이다. 스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오늘의 우리 불교와 일본불교는 많은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지금 도쿄의 서남부에 있는 해안지역 가마쿠라(鎌倉)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賴朝)가 군사적 지배기구인 막부를 세웠던 1192년부터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멸망하기까지의 약 150년간을 말한다)에 새롭게 등장한 불교,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의 남도(南都, 나라)불교나 헤이안(平安, 794년 이후부터 가마쿠라 이전까지)시대에 이루어진 불교가 아직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보편적인 불교 속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가마쿠라 시대에 이루어진 신불교는 일본적인 특수성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가마쿠라 신불교가 오늘의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만의 특수성 강화…主流로 떠오르다 호넨, 종합불교 탈피해 수행 쉬운 염불 선택 다른 佛法 배제해 兼修 차단…종파불교 필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불교는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배출했는데,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사람은 단연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 1133~1212)스님이다. 스


일본 귀신마을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일본귀신마을로 불리우던 비석마을 산복도로변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다. 지금도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 등이 계단, 담장의 부재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덕분에 도시괴담 등을 모아놓는 사이트에 관련 괴담이 자주 보인다.아미동 비석마을은 부산의 역사를 좀더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네다. 이 곳 역시 일본인들이 공동묘지를 남겨두고 떠난 후 5년간 비어 있다가, 한국 전쟁 때 피난 온 사람들이 꽉 차있는 시가지를 피해 마을을 꾸렸던 것이다.비석마을의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면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은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활용되었다. 토성역을 나오면 탐방로 안내판이 보이고 고갯마루에 마을지도가 있다. 골목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비석을 사용한 건축물 앞에는 안내판도 있다.아미동 비석마을의 진수를 맛보려면 숨은 그림을 찾듯 비석의 자취를 찾아내는 게 흥미롭다. 감천문화마을처럼 개방성을 지닌 마을이 아니다. 삶의 골목을 거니는 게 부담스럽다면 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인 아미문화학습관이나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을 방문하길 권한다.아미문화학습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