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두천 3.3℃
  • -강릉 5.4℃
  • 박무서울 3.9℃
  • 박무대전 3.6℃
  • 연무대구 4.6℃
  • 맑음울산 4.0℃
  • 맑음광주 1.3℃
  • 맑음부산 5.1℃
  • -고창 0.5℃
  • 맑음제주 5.7℃
  • -강화 2.0℃
  • -보은 1.6℃
  • -금산 -0.1℃
  • -강진군 0.1℃
  • -경주시 4.0℃
  • -거제 2.8℃
기상청 제공

부처님의 ‘유아독존(唯我獨尊)’과 예수님의 ‘유아일도(唯我一道)’

쫓겨난 목사의 부처님 사랑

부처님의 ‘유아독존(唯我獨尊)’과 예수님의 ‘유아일도(唯我一道)’

쫒겨난 목사의 부처님 사랑



“길거리나 전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포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마치 동물원에서 탈출한 맹수를 보는 것 같아 겁이 납니다. 예수님이 정말 자신을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셨습니까?”

어느 불교시민단체의 초청을 받아 강연하던 자리에서 받았던 질문이다. 아마 같은 의문을 갖고 계신 불자님들이 많으실 것 같다. 하여 오늘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을 나누고 싶다.


사실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

‘예수천당 불신지옥’ 또는 ‘예천불지’로 회자되는 이 배타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적지 않다. 그때 목사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기독교성서 내용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

이 말은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길거리 전도를 하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한 말이다. 이 기록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해석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이 기록을 사실의 언어로 읽는다. 모든 인류에게 기독교의 유일성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 이 기록을 사실의 언어로 읽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주관적인 ‘고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고백의 언어로 읽으면 이렇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이처럼 기독교성서를 사실의 언어로 읽느냐 고백의 언어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줄리엣에게 고백하는 로미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로미오의 그 마음은 진실일 수 있다. 그런데 로미오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우스꽝스런 일이 된다. 게다가 “당신들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강요까지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렇다고 기독교성서의 모든 기록을 고백의 언어로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의 로마황제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기록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기록과 돌아가신 후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록까지 사실의 언어로 읽으면 기독교는 현대 과학과도 마찰을 빚게 된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목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또 하나의 기록은 이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요한복음 14장 6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있기에 더욱 권위를 가진다. 교회 안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들이대면 대부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의문을 제기했다가는 성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되어 사셨던 예수님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깨우침의 의미로 나는 이해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 또한 예수께서 깨우침을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듯이, 신(궁극의 실재<ultimate-reality>, 또는 도<道>나 이<理>, 법<法>이라고 해도 좋다)과의 합일은 깨우친 자아(각성된 각자의 진정한 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선언으로 나는 읽는다.

그런데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이 문장이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교회나 특정 공동체, 또는 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순수하게 예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고백의 언어일 수도 있지만 특정 공동체의 조직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탄생설화

석가모니 부처님과 예수님의 탄생설화를 비교해보면 두 분 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태어나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 아이를 잉태했다. 열 달이 지나고 아기를 낳으려고 집에 가던 길에 갑자기 큰 나무 한 그루가 마야부인에게 넙죽 절을 올리자 부처님이 옆구리에서 튀어나와 이렇게 외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 내가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가 약혼을 한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기독교성서는 말한다. 잠자리를 같이 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요셉은 마리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파혼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성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셉아,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일은 성령(하느님의 거룩한 영)께서 하신 일이다.”

두 분 모두 비범한 분답게 비범한 탄생을 하셨다. 그런데 부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유아독존(나 홀로 존귀하다)’을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인이 되신 후에야 ‘유아일도(나 외에 다른 길은 없다)’를 말씀하셨으니 부처님이 한 수 위인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이 예수님보다 더 독선적인 분이셨을까? 탄생설화를 사실의 언어로 읽으면 이런 유치한 논쟁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불자님들 가운데 부처님의 탄생설화를 사실의 언어로 읽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태어나자마자 걷기도 하시고 말씀도 하셨다는 전승이 과학적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기초상식이니까.

그런데 기독교인 가운데는 과학자나 의사들조차 예수님이 남녀의 성적 결합 없이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성서무오설 때문이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오랜 교리에 의해 오늘날에도 비과학적인 배타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인이 많은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한 해석도 불교에서는 자유로운 것 같다. “그건 후대에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에 의해 헌정된 것”이라는 해석에서부터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면 유아독존하는 것”이라는 폭넓은 적용까지 막힘이 없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예수님의 ‘천상천하 유아일도’를 나와 같이 해석하는 사람은 이단자라는 말을 듣는다.


교리기독교의 종말

내가 이 글을 쓰기로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변명을 좀 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본래의 기독교는 그렇게 막돼먹은 종교가 아닌데, 스승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또는 이용하는 제자들에 의해 무례한 종교가 되었다. 하여 현실기독교는 이렇게 못난 꼴을 하고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글로써나마 불자님들께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수를 배반한 ‘변질된 기독교’가 이른바 ‘보수정통’이 되어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인류에게 큰 죄를 저질러 왔다. (언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거의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더욱 부끄럽고 슬픈 것은 그 거대한 역사의 일탈이 지금은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로 이어져 우리 사회에 온갖 갈등을 몰아오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하여 기독교 조직에서 오랫동안 녹을 먹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피해를 입은 이웃종교인들에게 마음 깊이 사죄드린다.

하지만 나는 감히 예언한다. 보수정통을 자처하는 배타교리 기독교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종주국인 유럽에서는 한국과 같은 형태의 근본주의 기독교는 거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직은 소수지만 한국에서도 배타교리에서 벗어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인류애를 실천하고자 애쓰는 젊은 목회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작지만 생동하는 교회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지금은 한창 기승을 부리지만 수만 교인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형교회들도 변하지 않으면 소멸될 것이다. 하여 조금만 더 개신교인들의 무례를 참고 기다려달라고 불자님들과 이웃종교인들께 부탁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기사출처 : 불교포커스 (류상태 목사,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



해방70년 - 근대불교제종파
해방70년 - 근대불교제종파 사진 : 예천 회룡포 광복 70년의 한국불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천6백년의 한국불교사를 정립하면서 새로운 미래불교를 펼쳐가는전환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그동안 하향과 상향의 신앙형태를 모두 겪었다. 국가의 절대적인 지원아래 위에서 밑으로 전해지는 하향의 귀족불교와 처절할 정도의 박해를 받으면서 밑에서 위로 전개했던 민중불교를 다같이 경험했고 이제는 비호도 탄압도 없이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그 기간이 광복 70년일 때 짧은 세월동안 많은 과거가 정리되었고 그 위에 앞으로의 역사를 이끌어갈 설계도가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여겨진다. 특히 젊은 스님들의 수행열과 신도들의 높은 의식구조는 한국불교를 늘 깨어있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종단일 때 과연 오늘의 각 종단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그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종단의 현황은 바로 한국불교의 현주소와 직결되는 까닭이다.종파불교라는 말은 한국불교의 한 특징처럼 되어 있다.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후 많은 스님들이 입당하여 수학했고 돌아온 후 한



한해를 시작하는 날의 뜻

一年(いちねん)の始(はじ)まりの日 한해를 시작하는 날 元日(がんじつ)、元旦(がんたん) 日本(にほん)では1948年(ねん)に「年(とし)のはじめを祝(いわ)う日(ひ)」として法律(ほうりつ)で国民(こくみん)の祝日(しゅくじつ)と制定(せいてい)されました。 「元日(がんじつ)」は1月(いちがつ)1日(ついたち)のこと、そして「元旦(がんたん)」というのは1月1日の朝(あさ)の事(こと)です。「元」という字(じ)には「一番(いちばん)初(はじ)め」という意味(いみ)があり「旦」という字(じ)には「朝(あさ)」「夜明け(よあけ)」という意味(いみ)があります。 古来(こらい)から行(おこな)われてきた元日(がんじつ)の風習(ふうしゅう)は、現在(げんざい)でも受(う)け継(つ)がれています。今(いま)でも私達(わたしたち)は歳神様(としがみさま)をお迎(むか)えするために門松(かどまつ)を門(もん)の前(まえ)に飾(かざ)ったり、鏡餅(かがみもち)を備(そな)えたり、前日(ぜんじつ)に準備(じゅんび)したおせち料理(りょうり)を食(た)べたりしています。また、子供(こども)は親(おや)や親戚(しんせき)からお年玉(としだま)をもらいます 일본에서는 1948년 '한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날'로서 법으로 국민의 경축일(국경일)로 제정되었습니다. 간지쯔는 1월1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