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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해방70년 - 근대불교제종파

해방70- 근대불교제종파

 

 

     사진 : 예천 회룡포


광복 70년의 한국불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6백년의 한국불교사를 정립하면서 새로운 미래불교를 펼쳐가는전환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그동안 하향과 상향의 신앙형태를 모두 겪었다. 국가의 절대적인 지원아래 위에서 밑으로 전해지는 하향의 귀족불교와 처절할 정도의 박해를 받으면서 밑에서 위로 전개했던 민중불교를 다같이 경험했고 이제는 비호도 탄압도 없이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그 기간이 광복 70년일 때 짧은 세월동안 많은 과거가 정리되었고 그 위에 앞으로의 역사를 이끌어갈 설계도가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여겨진다. 특히 젊은 스님들의 수행열과 신도들의 높은 의식구조는 한국불교를 늘 깨어있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종단일 때 과연 오늘의 각 종단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그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종단의 현황은 바로 한국불교의 현주소와 직결되는 까닭이다.종파불교라는 말은 한국불교의 한 특징처럼 되어 있다.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후 많은 스님들이 입당하여 수학했고 돌아온 후 한 종문을 개창하는데 그것은 인도의 부파나 중국의 학파와는 달리 종파의 성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까지 형성된 59산이었고 그 밖에도 여러종파가 성립된다. 그 수가 점차 불어나자 회통 겸수 원융이라는 포현 아래 일치와 조화의 통불교운동도 있었으나 선.교 양종은 독자의 특성을 살리면서 꾸준히 발전했고 다양한 입장으로 불교를 조명 하므로서 한국불교를 성숙케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고려말까지 지속된다.

비록 종명은 바뀌었지만 선.교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 11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유교입국을 표방한 조선조에서 불교는 곧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종파도 11종에서 7종으로 그리고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축소되었다가 급기야는 이마저 폐쇄된다.이후 외형적으로는 무종의 상태가 계속되었다. 종명 없이 산중에 은거한 산승시대가 조선조 말까지 이어졌고 다만 내면적으로 참선과 강학과 염불의 삼문수업을 하면서 선가만이 근근이 그 맥을 전했을 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일제하를 맞는다.일제하의 암흑기에서 한국불교는 끝없이 저력을 발휘했고 어용종단인 원종에 맞서 임제종이 결성되었다가 1941년 비로서 조계종이 성립되지만, 이시기에 전통불교와는 다른 신흥불교가 등장해 주목되고 있다. 신흥불교란 새로이 일어난 불교단체를 말하며 기성불교에 대칭되는 표현이다.

신흥불교란 용어는 기실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을 필두로 발생한 신흥종교 14계통 중 불교계통에 속하는 단체를 일컫는다.


그 효시가 1872년에 등장한 묘련사(일명 선음줄교)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와 조선 도교사에 의하면 묘련사는 최성환.정극경.유성종 등 일단의 거사들이 서울삼각산 법련사에 근거를 두고 결사 조직한 염불단체로서 주로 관음정진을 하였다.그런데 이 관음신앙은 종래의 관음경을 소의경전으로 한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진 중에 일어난 관세음보살의 감음으로 쓰여진 제중감로를 중심한다. `제중감로'는 관세음보살의 기운이 손끝에 내려 찬술된 강필로서 전1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4년동안 일곱곳에서 11회에 걸쳐 만들어졌다.

법화.화엄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그 위에 관음신앙이 신비롭게 전개된 제중감로를 경서로 해 묘련사는 결사운동을 폈고, 당시 승려가 도성출입이 금지된 상태에서 서울포교를 했다는 것은 비록 거사불교이지만 놀라운 일이다.

련사 조직은 약 150명이 참여했으며 주로 민간층을 포교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묘련사가 순수 불교단체라기 보다는 문창제군과 부우제군과 관성제군까지 모신 혼합신앙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이다. 금강경탑을 모방한 지장본원경탑과 문수반야경탑까지 조성한 묘련사는 한일합방 전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묘련사 이후 신흥불교는 일제하에서 10여개가 나왔다. 1937년 일본인 촌산지순이 작성한 조선의 유사종교란 보고서에 보면 불교극락회.불교선양보경회.감로법회.원각현원교.영각교.대각교.불법연구회.오방불교.광화교.원융도 등이 기록된다.


불교극락회는 1925년 박운교가 만든 것으로 경기도 고양군에 본부를 두었으며 명심견성과 불타의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


영각교는 연화사의 승 이호필이 영적인 체험을 얻어 1919년에 창교했으며 본부는 서울 종로6가에 둔 단체이다.


원각 현원교는 임제종의 신도 김영호가 1929년 서울 사직동에서 결성했고 몇차례의 불법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감로법회는 서울 이화동에서 김기선이 조직한 단체이며,


원융도는 경기도 포천에서 홍우창이 만든 단체이다.


런데 촌산지순은 백용성 스님의 대각교까지 신흥불교에 포함시켰다.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1922년 서울 봉익동 대각사에 대각교의 간판을 건 백용성 스님을 요시찰인물로 삼았을 것이다. 기미년 삼일운동 33인의 한분이요 중국 만주와 경남 하동에 생산불교의 일환으로 농장을 개설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한 스님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대각교를 유사종교로 탄압하고 있다.


불법연구회는 원불교의 전신이다.

1916년 소태산 박중빈에 의해 발족된 `불법연구회'는 처음 저축조합으로 시작하였고 이어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다란물건판양생소'란 긴 간판을 걸었다가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으로 고쳤으며 이를 다시 불법연구회로 개칭한다.원불교는 소태산의 사후인 1948년에 붙여진 교명이다. 불법연구회 당시 소태산은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을 표방하면서 불교단체의 입장에 섰고 교전인 불교정전을 김대은 스님의 명의로 발간 하였다. 금강경을 본 후 석가모니를 연원불로 모시고 불법을 주체로 삼아 대 회상을 건설하겠다는 소태산의 불법연구회는, 유교.도교.기독교.동학.증산교의 사상까지도 교리내용에 포함시켜 단일사상의 정통 불교로 볼 수는 없으며 불교, 비불교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방불교는 김치인이 만든 것으로 정역사상이 가미되어 있으며,


광화교는 김선기가 창교한 단체로 오방불교에서 분파된 것이다. 이 신흥불교 단체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소멸되었고 다만 불법연구회만이 광복 후 원불교로 개칭하여 발전하고 있으나 계통별로는 불교보다 일반종교에 가깝다.


일제하의 상황에서 또 하나 특이할 것은 일본불교의 상륙이다. 일본의 불교가 이 땅에 처음 온 것은 일련종의 승려 일지가 고려 때 들어와 전법을 꾀하다 돌아갔고, 조선조 임진왜란시 진종대곡파의 승려 오촌정신이 종군승으로 따라와 부산에 고덕사를 짓고 왜군의 염불소향을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진출은 한일수호조약이 맺어진 다음 해인 1877년부터이다. 역시 진종대곡파의 승려 오촌원심이 들어와 부산에 본원사를 세웠는데 그는 오촌정신의 후예임이 흥미롭다.

이를 시발로 일본불교는 다투어 한국진출을 꾀하는데 공히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임에 주목된다.

일본불교 929파가 상륙하자 일본정부는 종교단체법 시행령으로 통합을 시도했고 이에 광복 전까지 919파가 남았다.

이 때의 여파로 동학계통의 수운교가 흑룡사 간판을 걸었고 일반종교인 금강여도가 진종동붕회에 가입되어 한동안 불교단체의 행세를 해야만 했다.


또한 일련종과 정토진종은 일제하의 거점 확보로 광복 후 `일련정종 창가학회' 등이 들어오는데 발판을 마련한다.이밖에 일제하에서 불교계통이 아니면서도 불교적인 입장을 취한 단체로 천불교.대화교(이상 동학계). 칠성교(정역계). 미륵불교. 증산선불교. 미륵불교 포교소(이상 증산계). 정토사(목계). 정도교(일반종교)등이 있다.

일제하의 신흥불교 내지 이를 표방한 단체들은 실제 한국불교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불교단체를 표방 하므로서 일제의 탄압을 모면하려 했고, 또 광복 후에는 불교종단에 편입해 교리의 모호성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굳이 공적이 있다면 비록 순수불교는 아니지만 한국불교가 종명조차 사용할 수 없는 공백기에 불교적인 입장을 취하므로서 일반에게 불교와의 인연을 촉매 시켰다는 점이다.


암흑기를 벗어나 광복이 되었을 때 공식적인 불교종파는 조계종 뿐 이었다.

그리고 조계종은 1954년 이승만박사의 소위 비구 대처에 대한 유시를 내릴 때 까지 10년간은 선교양종의 본산으로서 일제에 의해 변질된 전통불교의 본 모습을 찾는데 주력한다.

그런데 이 무렵 불교계 저변에서는 새로운 불교단체들이 태동하고 있었다


 하나가 대원광 김정운스님에 의한 대승불교협화회이다.

정운스님은 수원용주사 출신으로 일찍부터 법화경에 심취했고 1927년 법화계 최초의 사찰인 묘수사를 창건한다. 그리고 법화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194512월에 발족한 것이 대승불교법화회였고 여기서 오늘의 법화계 종단들이 창종된다.


또한 경북 영일에서는 밀교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울릉도 출신의 회당 손규상 씨에 의해 참회원이 1947년에 개설되고, 이어 `밀교금강송심인불교재가보살정도회'란 이름으로 바꾼 후, 19538월 대한불교진각종으로 개명한다. 여기서 오늘의 밀교계 종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모악산 금산사를 중심해서는 `금산사미륵불포교소'와 미륵불교와 무교가 발생해 오늘의 미륵계 종단을 형성하는 모태가 된다.이렇게 조계종을 중심으로 여러 불교 신행의 단체들이 등장하면서 한국불교는 과거 종파불교의 양상을 재현하게 되었고,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되면서 18개 종단을 구성한 후, 다시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다종파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종파불교는 과거의 종파와는 그 내용이 다르다. 뚜렷한 이념에 의해 구성되고 더불어 종지 종풍을 진작하는 종단도 물론 있지만, 많은 종단들이 교의 보다는 종권분쟁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따라서 종조 종지 종단의 종체를 분명히 갖춘 곳은 2/3를 넘지 못한다. 또한 종명도 과거 59산을 비롯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종명이 모두 등장하고 있는데 종맥이 단절된 상태에서 과연 바람직한 중흥이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종단 중에는 아직도 신앙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 순수종단의 체계확립이 필요한 곳도 있고, 비밀결사단체처럼 종문을 개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이러한 제 문제들을 포괄해 미래를 이끌어 갈 현재의 불교종단들을 각 신앙의 계열별로 나누어 광복 70년 발자취 속에 살펴보기로 한다.

 

19625월 정부가 불교재산관리법을 공포하자 그동안 독자의 신앙문을 형성해온 각 단체들은 다투어 종단등록을 꾀하니, 광복 후 조계종으로 대변되어 온 한국불교는 급기야 종파불교시대로 접어든다. 불교재산관리법 하에서 한국불교는 통칭 18개 종단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 상태는 1988년 전통사찰 보존법이 생기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18개 종단은 각기 그 성격이 독특하지만 사상별로는 몇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조계종을 선종계로 보고 태고종 등 여타 종단을 교종계로 보는 입장과

둘은 한국불교를 현교와 밀교로 나누는 입장과  셋은 조계.태고를 선.교 양계로 두고 나머지 종단을 신앙형태로 보아 법화신앙계열과 화엄신앙계열과 미륵신앙계열과 밀교신앙계열과 정토신앙계열과 비구니계열과 유가밀교계열로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세번재의 입장을 취해 조계.태고 양 종단을 제외한 여타의 종단을 각 신앙계열별로 나누어 살펴본다.

법화계는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들이다. 성립순서로 보아 한국불교법화종, 대한불교법화종, 대한불교불입종, 대한불교일승종 및 대한불교천태종이 있다(불입종은 뒤에 관음종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문제가 있으나 여기서는 창종 당시로 한다). 그런데 천태종을 제외한 4개 종단은 기실 한종문으로부터 출발해 각각 독립한 종단들이다.즉 일제하에서 법화운동을편인사들이 한국적 법화신앙을 정립하고자 몇차의 회동을 가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한채 광복을 맞자 다시 단체를 결성한다. 그 결과 광복직후 대승불교법화회를 조직했고 다시 일승불교현정회가 구성되었다. 이때에 참여한 주요인사로는 김혜선.이홍선.예혜교.전길춘.김정혜.최호민.김법능.김득조.김갑렬.김기석. 임화산스님 등을 들 수 있는데 모두 큰어른으로 추앙받는 분들이다.


또한 이 무렵 법화계의 사찰로는 1927년에 세워진 묘수사를 비롯해 본 능사포교당.혜광사.묘련정사.묘각사.무량사.일승사.법화사.가황사등이 있다. 그러나 법화계의 단일종단은 구성되지 못했다. 교리 의식 제도에서의 의견차도 있었으나 참여인사들의 개성이 너무 강했다. 그 결과 여러번의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결국 4개 종단으로 분리되고 만다.

단지 1959년에 창간해 3호까지 발행된 <묘법이란 잡지가 단일화를 염원했던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 줄 뿐이다.


앞의 4개 종단과는 달리 대한불교천태종은 독거의 인맥과 배경을 가지고 창종된다. 그러나 법화사상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앞의 종단들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법화계열로 소개한다.한국불교법화종은 법화계에서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창종주는 김혜선스님이다. 본 종에서 법주로 존칭되는 스님은 경기도 수원시 북수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운운이고 당호는 물착이다. 그는 청소년기를 일본 등 동남아에서 보낸 후 귀국해 불문에 귀의했다. 1931년 본능사에서 득도하고 숭인동에 본능사포교소를 세운 그는, 신행회와 본화회를 만들어 법화운동을 펼쳤고 이를 모체로 광복 후 대승불교법화회를 조직한다. 동회는 피난시인 1951년 부산에서 등록을 필하였고 본부는 묘련정사를 거쳐 법화사에 두었다. 법화사는 스님이 세번째 세운 사찰로 당시로서는 현대식 건축물이다. 여기서 법화계의 무수한 역사가 이루어졌고 지금도 본 종의 총본산으로 되어있다.

대승불교법화회는 1960년 한국불교법화종으로 바뀐다. 그 해에 재단법인을 설립했고 1969년에 불교종단으로 등록했다. 그 후 1986년에 불교종단으로 등록했다. 그 후 1986년 법주직을 사임할 때까지 스님은 기도와 집필과 강설로 지냈고 법화신앙의 철저한 법을 확립코저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일본법화계와 인연이 깊었지만 한국적인 정통법화에 열정을 쏟았고 법화신앙에 재래의식과 민간신앙이 결부되는 것조차 거부했다.김혜선법주 이후 한국불교법화종은 2대 김혜호(규현)스님과 3대 최혜담(대식)스님으로 이어진다. 또한 행정책임은 초기에 사무총장제로 하다가 총무원장제로 바꾸었다. 이동제, 김규현, 최중식, 김신현, 최중식스님이 맡았고 199311월 김광태스님이 7대 원장에 취임한다. 재단법인은 설립이래로 김신현스님이 맡고 있다. 종단 산하기관으로는 불교아카데미포교원과 교양대학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월간 <한국법화가 발행되고 있다. 교세는 사찰 50여개에 신도 15만을 헤아린다. 종조는 대각국사 의천,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 무량의경, 관보현보살행법경이다. 본종은 3대 종정의 임기만료 후 아직 새로운 종정이 선출되지 못했고 김광태 총무원장이 직무대행을 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있어 현재 내적인 정비작업이 진행 중이다.


대한불교법화종은 김갑렬스님에 의해 창종 된다. 스님은 충남보령 출신으로 법명은 정각 또는 해룡이며 법호는 혜일이다. 불교가정에서 성장해 영대가 밝았던 스님은 기도의 화신이었다. 백일기도는 수없이 했고 천일기도도 가지니 그 과정에서 1946년 무량사가 세워진다. 성북동 삼각산의 암석 위에 세운 무량사는 뒤에 대법정사로 바뀌는데 이곳은 초기부터 법화계의 중심이 되었다.일찌기 법화경에 심취해 법화계의 여성 지도자로 활동한 스님은 화계의 단일종단에 힘썼으나 여의치 않자 1956년 무량사에 대한불교정각회를 세운다. 이어 1960년에는 대한불교법화종으로 개칭해 법인설립을 필했고, 1969년에는 불교종단으로 등록하였다. 이 무렵 많은 법화계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월간지 <백련도 간행된다. 이후 법화계의 여스승으로 불리면서 1천여개의 사찰과 백만 신도를 이끌었던 스님은 1982년 세연을 마쳤다. 그의 사리탑은 보령에 마련된 정각정사에 세워져 있다.초대 종정 사후 본종은 노정공(2), 신혜성(3)스님으로 이어졌고 199211월 문구암스님이 4대 종정으로 취임해 현재에 이른다. 또한 총무원은 박법안스님에 이어 최근 김대호스님이 15대 원장에 취임했다. 그사이 종단은 숙원불사였던 회관이 마련되어 총무원을 서울 삼선교로 이전했고, 전국에는 13개 교구종무원이 설치되었으며, 미얀마와의 불교교류를 비롯해 해외포교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전통사찰보존법과 함께 사단법인으로 변경한 본종은 총본산도 고성 안정사로 이전했으며 1983년부터 꾸준히 <법화종보를 내고 있다. 종조는 대각국사 의천, 본존은 십계만다라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며,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이다.


대한불교불입종(관음종)은 이홍선스님에 의해 창종 된다. 스님의 본명은 용이이고 법호는 태허이다. 조선불교선교양종의 교정인 선암사 경운스님의 맥을 잇고 있다. 스님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출생해 경성예비전문학교를 나온 후 젊은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출가 득도 후 다시 산서성의 명찰과 대덕들을 순방하며 경륜을 쌓는다. 스님의 법화운동은 1940년 숭인동에 묘각사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지만 광복을 전후해 일련의 교화활동을 편위, 1951년 상주로 내려갔다.여기서 백화암을 짓고 5년간 용맹정진을 다졌던 스님은 민족의 심성에 맞는 독창적인 법화사상을 정립한다. 상경해 탑골 공원을 시발로 대중포교에 나선 스님은 법화계의 난립상을 극복하고자 1957년 일승불교현정회를 조직했고, 단일화를 위한 각고의 심혈을 기울였다. 법화종문의 정통성과 한국적인 의식개혁과 새불교운동을 전개했던 스님은 법화계의 통일이 어렵자, 1965년 대한불교불입종을 창종한다. 그는 끝없는 정열로 법화신앙을 일반화시키면서 불종대의17권의 저서를 출간했고 선법에도 밟아 `기해단전법'의 체계를 세우기도 했다. 1979년 세연을 다하면서도 광복절의 국기게양을 당부했던 스님은 128과의 사리를 남겼고 그 중 28과가 총본산인 묘각사에 안치되었다.홍선스님의 사후 불입종은 우경조(2), 조종현(3)스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1988년 종명을 관음종으로 바꾸면서 기존의 종명을 고수한 우경조스님은 총본산을 충북 보은의 화광사에 두고 총무원을 충북 제천의 송화사에 설치했다. 총무원장은 김경암스님이며 법화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월간 <세간불교를 간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보시의 밤을 제정해 불교예술제를 열기도한다.관음종은 종명개칭 후 4대 종정으로 김대천스님이 취임했고 전통사찰보존법에 의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보살의 실천 불교를 표방하면서 법화신앙의 생활화에 주력하고 있는 본종은 매년 4월 국제 불교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서울불교문화대학과 보살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일찌기 월간 범성을 간행했던 본종은 현재도 계간지 백련사, 월간 불교시보를 발행하고 있다. 전국에는 9개 종무원이 설치되었으며 사찰 3백여개에 신도가 1백여만에 이른다. 전국신도회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관음합창단도 조직되어 있다. 총무원장은 이홍파스님이며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회장과 한일불교문화교류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종조는 대각국사 의천,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이다.


대한불교일승종은 최호인.예혜교스님 등에 의해 창종된다. 법화계의 산역사이기도 한 예혜교스님은 일승회를 조직해 법화종문의 단일화에 앞장섰고, 최호민스님은 수많은 법화운동에 참여하면서도 항상 자신을 들어내지 않던 분이다. 최호민스님은 법명이 혜정으로 성동구 상왕십리에서 출생했다. 휘문의숙을 나와 본능사에서 법화경을 공부한 후 청도사를 창건한 스님은 1969년 대한불교일승종이 창종되자 초대 종정에 오른다.일승종의 창종은 총본산인 성북동 일승사에 이루어졌다. 2대 종정을 지낸송묘익스님이 1945년에 창건한 일승사는 처음 원구사라 하였고 2천여평의대지에 부속건물이 7동으로 4개 종단의 총본산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삼계제일의 일승종이 더욱 발전해 법우가 메마르지 않게 하소서"를 기원하며 평생을 법화경 속에 살았던 송묘익스님의 사후, 본종은 유영섭(화보) 노순도(갑일) 박종수(월봉)스님으로 이어졌고 현재 권인수(범호)스님이 6.7대를 연임하고 있다. 총무원장은 유영섭. 예봉옥. 권인수. 김벽송. 정치봉 스님에 이어 김혜정스님이 8대째이다. 교세는 3백여개 사찰에 신도가 40여만에 이른다.종조는 태고 보우국사이며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이다.최근 일승종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창종의 모체였고 총본산이었던 일승사를 매각하고 교문리에 상봉사를 건립해 총본산과 총무원을 이전할 계획이다. 한국불교의 제 신앙계열 중 가장 먼저 성립된 법화계는 광복 50년과 그 연맥을 같이 하면서 많은 변화를 보였고 4인의 창종주 시대에서 이제 새로운 법화신앙의 문을 열면서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국의 법화신앙계열은 대략 세가지 형태로 나누어지고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법화사상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구성한 단체와,

둘은 법화사상 위에 재래의 민간신앙을 결합한 단체와,

셋은 일본 법화계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단체 등이다.

일본 법화계는 다시 일련종계와 일련정종 대석사계와 그 신도단체인 창가학회계와 법화종계열의 군소 단체로 나누어지는데 그 지부형태로 들어온 단체까지 합하면 수십개파를 헤아린다.


여기서는 성격상 일본 법화계는 제외하고 정통 법화종단만을 살펴보는데 그친다.한국적인 법화계열은 전 호에 소개한 한국불교법화종 대한불교법화종 대한불교 불입종(관음종) 대한불교일승종과 대한불교천태종 및 대한불교 영산법화종등이다.이중 천태종과 영산법화종은 인맥이나 법맥상 앞의 종단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흔히 소백산의 기적으로 불리는 천태종은 박상월스님에 의해 창종 되었다. 스님의 속명은 준동이고 법호는 원각이다.강원도 삼척에서 출생한 스님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5세부터 구도를 뜻해 삼태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렸고 이어 차력 축지 등의 선도술도 배웠다. 그 후 불문에 귀의해 제 경전을 공부하고 선지식을 찾던 스님은, 32세에 중국에 건너가 곤륜산을 비롯한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티벳 등지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광복되던 해에 그는 소백산의 백자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봉팔문 중 제4봉 밑의 연화지에 초암을 짓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해 6년만인 41세 섣달에 도각을 이루었다. 도각 후 스님은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는데 초기는 주로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치병과 기도를 통해 영험을 얻자 전국 각처에서 소백산으로 향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스님은 대한불교천태종으로 문공부에 등록한다. 더불어 애국.대중.생활불교의 지표와 개인완성 불국토건설 법성체결합의 강령으로 종단의 체계를 세웠다. 황폐했던 산중에 2백만 그루의 잣나무가 심어지고, 전답과 농원을 개간해 자급자족의 종단 경제를 구축했으며, 험준한 산길은 도로로 변해 대중교통이 이용되고, 승속이 하나되어 관음주력과 주경야선과 강학공부를 병행하니 창종 수년만에 천태종은 대종단으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소백산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천태의 종지와 종풍을 정립하는데 진력했던 스님은 1974년 여름 세수 64세로 세연을 마친다. 그의 묘소는 수리봉 상봉에 모셔져 있다.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는 단위사찰로는 국내 최대이다. 50여동의 전각과 현대식으로 갖춰진 완벽한 기도시설은 위치가 산중이고 불과 20년내에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기록될 만 하다. 모든 기본 틀은 창종주 생전에 구비되었고 현재는 내적인 충실을 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상월스님의 입적 후 종단은 2대 남대충, 3대 김도용스님으로 이어진다. 남대충스님은 상월스님의 소백산 입산 때부터 시봉과 수련을 함께 한 수법제자이며, 김도용스님은 장좌불와로 유명하다.행정책임인 총무원장은 1980년부터 전운덕스님이 맡아 오늘의 조직체계를 이루었고, 산하기관으로는 금강불교대와 <천태종보및 월간지 <금강3개의 유치원이 있다. 최근 활발한 국제교류와 함께 천태종의 발상지인 중국 천태산의 국청사에 지자 의천 상월스님의 3조사상을 조성하였고, 천태종맥의 확립을 위해 천태삼대부등을 간행 중에 있다. 전국에 대규모의 회관 및 사찰이 건립됐지만, 사회복지시설의 확충이 아직도 과제로 남는다. 종조는 지자대사이며, 소의경전은 법화경법화삼대부천태사교의이다.


일반에게 영산법화사로 더 잘 알려진 이 종단은 이법화스님에 의해 창종되었다.스님은 27세부터 법화경에 심취해 박한영스님 등에게 법화사상을 공부했고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하다 광복 후 윤고암스님에게 수계한다. 스님은 스스로 법화행자로 칭하면서 법화신앙에 관한한 투철한 신념과 폭넓은 교학을 정립했고 이를 실천신앙으로 전개해 나갔다. 1955년에 진해 영산법화사를 창건하면서 전국에 16개의 영산법화사를 세웠고, 1964년에 출판부를 개설해 법화경에 관한 10여권의 저서를 내놓았다.특히 일본 일련종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정통해 창가학회를 절복한다는 저술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일련종의 신앙적 모순을 지적한 것으로 오랫동안 필독서가 되고 있다. 또한 어린이 포교용의 불교동화집부처님 말씀은 정부의 우량도서로 선정된 책들이다. 스님은 기도에 철저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은 포살참회 기도를 가졌고, 매년 세차례의 단식기도를 전 종도가 갖게 했으며, 현재 각 영산법화사에 모셔진 만다라도 성도절의 7일 단식기도 후 자필로 써서 봉안한 것이다. 만다라 앞에는 불사리탑을 안치하고 그 우측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일찌기 일본 태국 인도를 순례하며 석존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보탑을 건립한 스님은, 끝없는 저작과 왕성한 법문을 통해 한국적인 법화사상을 구축한 후 1977년 세연을 마쳤다.이 종단에서는 법화스님을 종조 겸 초대 법주로 모시며 경기도 장흥에 부도가 세워져 있다. 스님의 뒤를 이어 김행산스님이 2대 법주에 올라 현재에 이르고 총무원은 동숭동 영산법화사에 설치했으며 연화합창단이 활동 중 이다. 소의경전은 법화삼부경이다.


화엄계열이란 석존께서 깨달으신바 우주의 진리를 남김없이 설한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종단을 말한다. 한국화엄의 비조는 원효와 의상이다. 화엄계열 종단들은 대략 원효를 종조로 모시나 고려 때의 보우를 모신 곳도 있다.현재 화엄계열은 대한불교원효종 대한불교화엄종 대한불교총화종(이상 종단등록 순)3개 단체로 모두 불교재산관리법하에서 창종되었고, 큰 발전은 없으나 화엄사상을 본체로 통불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특징이다.조계종의 이른바 비구 대처의 분규가 치열해지고 정부의 불재법이 시행되자 대처계의 스님들은 새로운 종단을 모색하게 되는데 이 때 김경택스님이 중심이 되어 1963년 대한불교원효종이 창종된다. 그러나 당시는 종의원제도였고 본격적인 종단체제는 정수용스님이 초대 종정을 맡으면서 부터이다. 정수용스님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법명은 해인이다.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40여년간을 조계종에서 활동했고 당시 기림사 주지로 있던 중 원효종에 참여했다. 원효종은 총본산을 경주시 망월사에 둔 지방종단이었지만 급속히 발전했다. 여기에는 신라의 대성인 원효의 본고장이라는 점과 함께 불교계의 실력자인 이법홍스님의 참여가 큰 힘이 된다. 법홍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고 일본 입정대와 비에산학원을 졸업한 후 원효의 화쟁사상을 근간으로 대중불교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원효사상에 관한 수십편의 출판물과 동상건립과 연구회 설립 등을 꾀한 그는 실상비구스님으로 조계종의 재정부장을 역임했고 부산에는 금수사를 맡아 청소년교화에 주력했다.이렇게 정수용.이법홍 체제로 종단이 뻗어나갈 즈음 법홍스님은 일본에 건너가 장기간 체류하면서 난행과 수행 및 포교에 임했는데, 이 기간에 종단 내부에서는 분규가 일어나 수년간 종권다툼이 계속된다. 종단내분은 법홍스님이 귀국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이후 10여년간 조용히 내실을 꾀했으나, 근래 다시 안양암의 매각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종단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려 양분 또는 삼분의 양상을 맞았다. 현재 원효종은 이법홍스님이 금수사를 중심으로 종단재건을 꾀하고 있고, 서울 창신동 안양암은 별도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불교원효종이 창종된 상태이다.그동안 총본산은 기림사.망월사.금수사.안양암을 거쳐 다시 금수사로 왔고, 역대 종정은 정수용(1.2) 김경봉(3.4) 이설호(5) 엄상수(6.7) 스님을 거쳐 법홍스님이 8대와 9대째를 역임하고 있으며, 총무원장은 설대운스님이 6대째를 맡고 있다. 기관지로는 <원효종보<법사불교신문이있으며, 원효양로원과 원효사상연구원이 운영된다. 종조는 원효성사이며, 소의경전은 화엄경등이다.


화엄종을 창종한 분은 한능해스님이다. 속명은 영석이고 법호는 월승이며,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다. 스님은 18세에 출가해 당대의 화엄 법주로 유명했던 이해명스님에게 사사한다. 그 후 휘문의숙을 나와 다시 보현사.망월사.전등사 등에서 수행한 그는, 1929년 인천 간석동에 약사암을 짓고 화엄종의 터를 잡는다. 광복 후 스님은 해동공민학교와 해광여자기술학교를 설립해 교육계에 힘을 썼고, 조계종의 경기 종무원장을 맡으면서 종단에도 깊이 관여했다.불재법으로 종단이 난립할 때 그는 청정비구이면서도 새로운 종단의 창립을 뜻해 1966년 자신이 세운 해광사에서 화엄종을 세우니 원효의 화엄종맥을 다시 재흥함을 표방했다. 스님은 철저하게 내실 위주였고 계율이 엄했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모두 비구계를 지켰고 검소와 근면과 시간관념이 엄격해 화엄종의 독특한 종풍을 이룬다.1970년 능혜스님은 사리탑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세연을 다했고, 한구하스님이 뒤를 이어 오늘의 화엄종을 일구었다. 구하스님은 종회의장 정희수스님과 함께 1978년부터 장학재단을 설립해 지금까지 수천명의 인재를 길러냈고 그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총본산은 약사사이며 총무원장은 장화담스님이다.


총화종은 한국불교 제종단 중 특이하게 창립됐다. 조계종이 한창 분규에 휘말릴 때 불교계의 뜻있는 인사 5인이 화동위원회를 구성했고 등록까지 필하면서 화동을 꾀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에 종파를 초월해 결성된것이 1968년의 총화회이며 각 종단과 총화를 시도하면서 통불교운동을 전개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나자 결국 다음해 총화종이 창종된다. 초대 종정은 최득연스님이다. 총화종은 비록 단일종단으로 등록했으나 대승행원과 육화정신을 주창했으므로 초기엔 원효성사를 종조로 했으나 뒤에 서산대사를 거쳐 지금은 보우국사를 모시고 있다.또한 참여인사들도 쟁쟁해 본 종의 종정에 오른 분이 변설호.이장호.조종현스님 등 세분이고 권계환.전야옹스님도 뒷날 신생종단의 종정에 오른다. 이렇게 독특하게 출발하여 화려한 인맥을 구축했던 총화종은 한 때 낙맥상에도 처했으나, 최근 다시 체제를 정비했고 더우기 숙원사업이었던 총무원청사가 완공되면서 더욱 활기를 되찾고 있다.현재의 종정은 이동광스님이며 총무원장은 법원스님이다. 복지시설로 두개의 고아원이 있다. 소의경전은 반야경화엄경이다.


석존의 성도 20년 후 대애도니의 출가로부터 시작되는 비구니의 역사는 수많은 대덕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면과 뒤안길로 표현되는 조용한 수행의 장이었다. 그렇게 25백여년을 흘러오는 동안 뚜렷한 부파나 학파 또는 종파를 형성하지 않았던 비구니계에 종조 종지 종단의 종체를 형성한 것이 대한불교보문종이다.물론 각 종단마다 비구니회가 있지만 비구니로만 형성된 독자적인 종단은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문종의 성립은 불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또한 말법에서 정법으로 가는 과정에 불법의 보호와 가람의 수호를 맡는다는 비구니의 역활은 매우 중요하다고 보여진다.보문종의 출발은 세칭 탑골로 불리우는 보문동의 보문사에서 비롯된다. 고려 중엽 담진국사의 창건이래 비구니사찰로 이어져온 보문사는 1936년 이긍탄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비구니수행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았고, 특히 송은영 스님이 등장하면서 오늘의 종단으로 발전하였다.은영스님은 대전 신탄진에서 출생하여 동진출가한 분이다. 동학사에서 득도하고 보문사로 온 스님은 신심 기도 열정 등 모든 면에서 걸출한 여장부였다. 일제하에서 친일 권승들이 사찰을 수탈하려 할 때 긍탄스님과 함께 꿋꿋하게 도량을 지킨 스님은, 광복과 더불어 주지를 맡자 보문사 중창에 나선다.60년 대에 삼성각 선불장 산령각 범종각이 모두 이루어져 사찰의 면모가 일신되었고, 70년대에는 극락적 보광전 호지전 시왕전과 함께 경주 석굴암을 재현한 보문사석굴암과 오대산 월정사 89층석탑을 재현한 보문사 9층탑이 조성돼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렇게 되자 보문사는 한 때 단위 사찰로는 국내에서 가장 신도가 많았고, 8천여평의 대지에 수십동의 전각이 들어서는 등 도심에서는 쉽지 않은 대규모의 사찰로 자리를 잡는다.이에 비구니의 질적향상과 복지활동 및 재산권의 보호가 시급함을 느낀 스님은 사중에 보문 강원을 설치해 내전을 공부하게 하는 한편 많은 비구니들을 동국대 등 일반대학에 진출시켜 내외전을 겸비케 했고, 불우노인들의 거처인 시자원을 세우는가 하면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개설하는 터전을 닦았다. 더불어 당시까지 봉은사 용주사 말사등 조계종에 소속된 상태에서 독립해 최초의 비구니종단을 창종하니 1971년 보문원을 거쳐 다음 해 보문종으로 등록하였다. 초대 종정에 이금판 스님, 총무원장에 송은영 스님이다.1981년 은영스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보문종은 새로운 형태로 바뀐다. 지금까지 창종의 발판과 체제구성에 주력했던 모습에서 내적인 결실과 종풍의 진작으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보문사 위주의 종단운영에서 많은 말사들이 동참해 종단의 위상을 갖추는 계기도 마련된다. 또한 엄격한 계율과 수행으로 승풍진작을 도모하면서 유치원(3) 어린이집 양로원의 운영 및 보문지의 발간과 합창단의 결성 등 교화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총본산은 보문사이고 종조는 담진국사이며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소의 경전은 법화경이다. 역대 종정은 이긍탄 정명소 천일조 천혜만스님으로 이어지며, 총무원장은 송은영 천혜안 정혜일스님으로 이어진다.

미륵불은 석존의 뒤를 이어 이 세상에 출현할 미래불이며 그의 회상을 용화세계라 하므로 보통 `당래하생 용화교주 자씨 미륵존불'이라 부른다. 미륵은 석존의 생전제자였고 보처보살의 수기를 받아 후계불로 지명되었으나 12년 후 세상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이에 석존은 미륵을 위해 상생경하생경을 설하니 현재 미륵계에서 소의경전으로 받드는 미륵상하생경이다. 상생경의 미륵은 도솔천의 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중에 있으며, 하생경의 미륵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3회 설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게 된다.미륵이 언제 하생하는가는 여러 설이 있다. 경에는 567천만년설을 말하나 상징적인 숫자이고 이에 말법 3천년설과 오오백세설이 나오나 역시 불확실하다. 사실 미륵대망신앙은 불멸 후 4세기경부터 이미등장하고 있다.더불어 중국과 한국에 와서는 시대가 어지러울 때마다 미륵출세설이 나온다. 특히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근세에 오면 수많은 신흥종교가 발생하는데 그들은 저마다 미륵불을 자처했고 미륵사상을 교리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미륵신앙은 현세 불교의 전통적미륵관과 민간신앙의 기복적 미륵관과 신흥종교의 변형된 미륵관이 혼재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조화시켜 총체적인 미륵신앙으로 결집하는 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미륵의 하생이 중생의 10선도 실천과 결부된 것일 때 미륵 10선도의 운동전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명제들을 안고 출발해 이 땅에 용화불국토를 이룩하려는 종단들이 바로 대한불교용화종과 대한불교미륵종과 대한불교법상종 등이다.(종단등록 순).


대한불교용화종

본 종을 창종한 분은 서한춘 스님이다. 법호를 진공 또는 현무라고 한다.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11세에 선암사의 대강백인 김경운스님에게 5년간을 수학했고 이어 지리산 등지를 다니면서 참선과 주송과 술학을 연마했다. 그후 금강산 마하연의 불가지동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가졌고 39세때 미륵불의 수기를 받으면서 중생제도를 발원한다. 1931년 스님은 구성사를 짓고 포교를 시작했으며 이어 상불사 등 2개의 사찰을 세웠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모진 고초를 겪었다.광복 후 스님은 다시 위봉사를 비롯해 원각사 남일사 용화사 등을 세웠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교화와 함게 도제양성에 주력한다. 남녀 각 15명씩을 선발해 주경야선을 시켰고 더불어 교세가 팽창하자 1963년 대한불교용화종으로 등록을 필했다. 이 때의 신도수가 10만으로 용화종에서는 가장 전성기이다. 그러나 1966년 스님은 78세로 세연을 마쳤고 그의 묘소는 용화사 옆에 자리하고 있다.용화종의 총본산은 전주의 원각사이다. 1950년 창건된 원각사는 비구니들의 교육도량으로 전주에서는 대가람으로 손꼽히며 총무원도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용화종은 서한춘 스님에 의해 비롯되지만 역대 종정은 초대에 김득연스님이 맡았고 2대를 박무현스님이 맡다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총무원장도 최규선스님에 이어 현 이법덕스님이 2대째이다.용화종은 한때 사회적인 물의와 함께 세인의 따가운 시선도 있었으나 전승속이 기도와 정진으로 이겨냈고, 현재 특별한 종단사업은 펼치지 않으나 매우 견실한 조직운영을 보이고 있다. 종조는 진표율사이며 시원은 현장법사에게 둔다.


대한불교미륵종

미륵종을 창종한 분은 김홍현스님이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법호는 진규이다.스님은 보통학교를 나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39세시부터 수도를 뜻했다. 제방을 순력하면서 여러 종교의 신행을 체험했고 치병에 능해 수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1958년 스님은 광주 운니동에 들어가 8인과 함께 수련을 가졌는데 33야를 불면불휴하는 가운데 도각을 이루었다. 우주의 만상이 직관되면서 막힘이 없어 모든 사물과 마음을 교통하니 이를 진통사라 했다.1964년 스님은 대한불교미륵종을 세운다. 총본산은 처음 광주 통계사에 두었다가 뒤에 고창의 통훈사로 옮겼다. 그동안 금산사 종불사에 참여하면서 총본산에도 미륵종우방종을 조성했고, 천존.지존.인존의 삼존불상을 세우는 등 종단의 체계를 구축한다. 스님은 한 종단의 대표이면서도 평생을 흙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고령에도 논밭을 손수 일구었고 끝없이 찾아오는 신도들도 일하면서 맞으니 세인들은 농성이라 칭송했다.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과 기도와 구활로 일관하다 83세로 세연을 마친다.스님의 사후 종단은 원로이며 학승인 김민오스님이 이끌었고, 일찍부터 두 노사를 모시며 종단행정을 도맡았던 김태근스님이 3대에 취임해 현재에 이른다.미륵종은 지방에 위치하고 교세는 적으나 창종주부터 시행된 철저한 교육과 수련으로 모든 교도가 일체가 되어 수행을 생활화함이 특징이다. 또한 총본산의 법당을 도덕궁이라고 했듯이 모두가 도의규범에 철저하다. 현재 인덕연수원을 건립중이며 춘추의 정기수련회를 가진다.미륵종은 연원을 김계주법사에 두고 있으며, 소의경전은 미륵3부경미륵천륜경등이다. 현 총무원장은 김규희스님이다.


대한불교법상종

법상종의 창종주는 전영동 스님이다. 그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법호는 춘강이다.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강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만주로 건너가 약국을 경영하면서 독립군자금을 조달했고, 광복 후에는 대전에서 홍륜 학원을 세워 불우한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종교계에 참여한 것은 독립운동 당시부터였고 대종교 등을 섭렵한 후 불교에 귀의해 수행을 하던 중 미륵신앙에 심취한다. 1970년 스님은 미륵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불교법상종을 세웠고 3년간 이끌다가 세연을 마쳤다.전영동 스님의 사후 법상종은 여성운동가인 송인숙 스님이 이끈다. 그는 불암보육원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았고 그 공로로 대한어머니상을 받은 분이며 유성 감동에는 송덕비가 세워졌다.1974년 법상종은 2대 종정으로 남궁규 스님을 추대한다. 그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법호는 홍해이다. 일찍부터 기도생활에 들어가 계룡산 장수산 등에서 수행했던 스님은, 30세에 구월산수련을 통해 천지의 이치를 깨달으니 이를 한열사상이라고 부른다.그후 불암사를 비롯해 동양사 호국사 와우사 등을 창건한 스님은 신도안에 계룡학원을 세워 청소년교육에 힘쓰면서, 광복직후에는 국내 최초의 종교연합기구인 태극지하종교인연합회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이어 대전에 석굴암을 세우고 다시 서울 삼각산에 구복암을 세운 스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미륵신앙운동을 꾀해 동해 서해 남해에서 용화기도를 가졌고, 진안 마이산기도 회향시엔 이곳을 비행하던 미공군 조종사에 의해 기룡관세음보살의 모습이 촬영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는 81세의 고령에 종정으로 취임한 후에도 용화불국토기원대회 등 정열적인 활동을 보이다가 1976년 세연을 마치니 그의 한열사상은 현실참선이란 이름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로 보급되었다.남궁규 스님에 이어 용화종은 3대 최선애 스님, 4대 우준희 스님을 거쳐 현재 노우담 스님이 맡고 있다. 총무원장은 정경식 스님이다. 개종조는 대현 스님이며 중흥조는 진표율사이다.


자료출처 : 이경우 원장 /한국새종종교연구원


해방70년 - 근대불교제종파
해방70년 - 근대불교제종파 사진 : 예천 회룡포 광복 70년의 한국불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천6백년의 한국불교사를 정립하면서 새로운 미래불교를 펼쳐가는전환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그동안 하향과 상향의 신앙형태를 모두 겪었다. 국가의 절대적인 지원아래 위에서 밑으로 전해지는 하향의 귀족불교와 처절할 정도의 박해를 받으면서 밑에서 위로 전개했던 민중불교를 다같이 경험했고 이제는 비호도 탄압도 없이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그 기간이 광복 70년일 때 짧은 세월동안 많은 과거가 정리되었고 그 위에 앞으로의 역사를 이끌어갈 설계도가 그려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여겨진다. 특히 젊은 스님들의 수행열과 신도들의 높은 의식구조는 한국불교를 늘 깨어있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종단일 때 과연 오늘의 각 종단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그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종단의 현황은 바로 한국불교의 현주소와 직결되는 까닭이다.종파불교라는 말은 한국불교의 한 특징처럼 되어 있다.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후 많은 스님들이 입당하여 수학했고 돌아온 후 한



한해를 시작하는 날의 뜻

一年(いちねん)の始(はじ)まりの日 한해를 시작하는 날 元日(がんじつ)、元旦(がんたん) 日本(にほん)では1948年(ねん)に「年(とし)のはじめを祝(いわ)う日(ひ)」として法律(ほうりつ)で国民(こくみん)の祝日(しゅくじつ)と制定(せいてい)されました。 「元日(がんじつ)」は1月(いちがつ)1日(ついたち)のこと、そして「元旦(がんたん)」というのは1月1日の朝(あさ)の事(こと)です。「元」という字(じ)には「一番(いちばん)初(はじ)め」という意味(いみ)があり「旦」という字(じ)には「朝(あさ)」「夜明け(よあけ)」という意味(いみ)があります。 古来(こらい)から行(おこな)われてきた元日(がんじつ)の風習(ふうしゅう)は、現在(げんざい)でも受(う)け継(つ)がれています。今(いま)でも私達(わたしたち)は歳神様(としがみさま)をお迎(むか)えするために門松(かどまつ)を門(もん)の前(まえ)に飾(かざ)ったり、鏡餅(かがみもち)を備(そな)えたり、前日(ぜんじつ)に準備(じゅんび)したおせち料理(りょうり)を食(た)べたりしています。また、子供(こども)は親(おや)や親戚(しんせき)からお年玉(としだま)をもらいます 일본에서는 1948년 '한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날'로서 법으로 국민의 경축일(국경일)로 제정되었습니다. 간지쯔는 1월1일을